의열단, 1919년 11월 10일 길림에서 창립

정만진 2024. 10. 27.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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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립운동가 48] 10월 27일 타계한 권준 지사

[정만진 기자]

 권준 지사의 모습, 일기장, 저서 표지
ⓒ 국가보훈부
1959년 10월 27일 권준(權晙) 지사가 타계했다. 1895년 5월 2일 경북 상주 함창면 척동 168번지에서 출생했으니 향년 64세였다. 독립운동에 매진한 20대와 30대 때 그는 권중환, 권중석, 강병수, 진민각, 장종화, 장수화, 양무(揚武), 양무(楊武) 등 여러 이름을 사용했다. 수많은 이명은 권준 지사가 의열단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징표같다.

22세이던 1917년 광복회에 가입했다. 광복회는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제5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였다. 일본군 헌병대 습격, 친일파 처단 등 맹렬한 활동을 통해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 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 광복회가 해체되자 그는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로 간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고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은 "1920년대 의열투쟁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낸 단체(국가보훈처,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였다. 1910년대와 1920년대를 각각 대표하는 광복회와 의열단의 일원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권준 지사의 활동상은 짐작이 된다.

광복회 해체 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졸업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권준 지사가 "1921년 북경에서 김원봉과 같이 의열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조달, 폭탄 제조 등의 임무를 맡아 종로서, 총독부, 동척 등의 폭탄 투척과 동경 이중교 투척 등을 적극 지원"하였다고 소개한다.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활약상이다.

하지만 "1921년"은 "1919년", "북경"은 "길림"의 잘못으로 보인다. 의열단 결성 날짜는 1919년 11월 10일이고, 창립 장소는 북경이 아니라 이종암 지사가 전세를 얻은 길림성 파호문 밖 화성여관이다. 국가보훈부 공식 기록이 이처럼 사실과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놀란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을 살펴본다. 그곳에는 바르게 소개되어 있다. '다행이다' 싶어 안도한다. 공훈록 읽기를 그만두고 인명사전으로 눈길을 돌린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다음, 상하이 퉁지대학 공과에서 수학하였다. 같은 해 11월 중국 지린성에서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재기·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 등과 의열단을 결성하였다.

의열단의 활동 자금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의열 투쟁을 지원하였고, 김원봉·오성륜·김성숙·장지락(김산)·최원·이영준·강세우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의열단 활동의 핵심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4년 1월 김원봉 등과 중국 광저우에서 소집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권준 지사가 "의열단 활동의 핵심적 임무를 수행"한 독립운동가라를 사실이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되어 있다. 인명사전을 읽으니 '엉터리' 공훈록에서 받은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

권준은 한국, 중국, 인도, 몽고, 안남, 대만인 등으로 조직된 '동방 피압박 민족연합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또 중국정부 후원으로 남경에 설립된 '한국인 군사학교'의 교관을 맡아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국민 혁명군' 장교로서 북벌전에도 참전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당시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으로서 독립을 맞다

그는 독립을 맞아 곧장 귀국하지 않고 우한 지역 '교포 선무단(宣撫團)' 단장과 광복군 5지대장으로서 중국 체류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 힘썼다. 그후 1년 4개월이나 지난 1946년 12월에 비로소 귀국하였다.

24세에 압록강을 건넌 이래 27년 동안 독립운동을 한 권준 지사는 51세가 되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국군에 참여해 초대 수도경비사령관, 제1훈련소 소장, 제3관구 사령관, 제50 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광복회, 의열단, 중국군, 광복군, 임시정부 등에 들어 젊은 날을 송두리째 바친 권준 지사의 독립 이후 14년 생애가 그나마 안정된 면모를 유지했던 듯 보여 이 글을 마치는 필자의 마음이 평온하다. 타계 65주기를 맞아 삼가 그의 명복을 빌어본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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