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국가의 반인권범죄와 공소시효
노동운동을 하던 고 심진구씨는 주사파 운동권의 대부이자 ‘강철서신’저자인 김영환씨와 4개월 동안 함께 자취했던 사실 때문에 1986년 12월 안기부 남산분실에 영장 없이 연행됐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37일 동안 조사하면서 심씨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폭행하고 잠을 재우지 않는 등 가혹행위를 자행했다. 심씨는 어쩔 수 없이 허위자백을 했고, 결국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심씨는 1999년 한 월간지에 안기부에서 가혹행위를 받은 사실을 고백하였고, 이후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를 거쳐,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에는 가혹행위를 자행한 안기부 수사관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 안기부 수사관이 ‘고문한 사실이 없고, 심씨가 수사 과정에서 시종일관 자백했다’고 증언했으나, 심씨는 2013년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심씨는 2014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심씨의 딸은 아버지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가혹행위를 한 안기부 수사관들을 고소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문제였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심씨에게 자행한 고문 등 가혹행위 범죄는 공소시효가 지난 지 오래여서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재심 재판에서 증언한 안기부 수사관만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직전에 위증죄로 고소했다.
법원은 위증죄 형량으로는 이례적으로 안기부 수사관에게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고문 등 가혹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판시했다. ‘안기부 수사관이 국민을 상대로 한 불법 구금, 고문 또는 가혹행위는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중대 범죄이자 반인륜 범죄임이 분명하고 엄하게 처벌함이 마땅하지만, 심씨에 대한 가혹행위는 공소시효가 완료돼 처벌할 수 없게 됐다.’
법원의 일갈과 같이 수사기관의 고문과 군인에 의한 강간 등은 대표적인 반인권적·반인도적 국가범죄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등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국가기관이 오히려 이를 짓밟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범죄이고, 더구나 이러한 국가범죄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저지르기 때문에 진상을 은폐하기도 매우 쉽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이런 중범죄에 일반 범죄와 동일한 공소시효를 적용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국제법적으로도 이미 오래전부터 반인권 범죄는 전쟁범죄와 마찬가지로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 프랑스, 독일 등 서구 국가들도 인도에 반하는 범죄에 대하여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법률을 제정한 지 오래다.
우리도 특정 사안에 대해서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특별법을 제정한 바 있다. 1995년에 제정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과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그렇다. 두 법률에 따라 5·18 광주 학살의 책임자와 집단살해를 저지른 사람의 경우에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 2015년에는 살인죄에 대해서도 공소시효를 폐지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문 등 반인권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어두운 역사를 제대로 청산해본 적이 없다. 법적으로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공소시효였다. 반인권 범죄의 가해자들은 공소시효를 무기로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 떵떵거리며 천수를 누렸다. 이러고도 어찌 정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 국회에서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법률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논의 과정에서 흐지부지된 채 국회 회기 종료로 자동 폐기됐다. 이번 국회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정안과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다고 한다.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한다지만, 아무리 늦었더라도 반드시 바로 세워야 할 정의는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적어도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꼭 제대로 마무리되길 바란다.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연예인이 벼슬?” 인천공항, ‘별도 출입문’ 계획 철회
- “무기 버려!” “배고파?” 우크라군 작성한 한국어 대화 매뉴얼
- 애플 아이폰16, 인도네시아에서 판매 금지된 이유는?
- “더 놀아주세요” 사장님 퇴근에 울어버린 아기 손님 [아살세]
- 불법 촬영 2번 선처받고도…또 범행 저지른 20대
- ‘오리지널 김치’ 구하려고 번역기까지… 한식 열풍 ‘후끈’
- 한동훈 “난 보수정당 CEO… 특별감찰관은 당 대선공약” 압박
- “연남동 장원영?” 유기견 ‘밥풀이’의 놀라운 성장기 [개st하우스]
- ‘중국 일그러진 애국주의’…1위 분유회사 겨냥 맹공
- ‘금테크’ 성공한 함평군…황금박쥐 몸값 200억 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