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망해도 '삼겹살'은 살아남는다"…돼지고기에 진심인 청년 [월간중앙]

2024. 10. 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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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창업열전|뒷골목돗갈비 정재헌 대표

등록금 없어서 대학 못 가…20대부터 장사판 전전하며 외식업 공부
소금만 쳐도 맛있는 돼지고기가 진짜배기…전 매장 품질유지가 관건

뒷골목돗갈비 정재헌 대표는 10월 10일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노동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 못하면 프랜차이즈로 돈 벌 수 없다”고 강조했다. 최기웅 기자

“대한민국이 망해도 삼겹살은 살아남는다”는 좌우명으로 돼지고기 장사에 여념이 없는 청년이 있다. 20대부터 각종 돼지고깃집을 전전하며 서빙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 점장까지 오른 정재헌(38) 대표는 장사 마인드를 비로소 이해한 뒤 인천에 제주산 돼지고기를 파는 ‘뒷골목돗갈비’를 창업했다.

돗갈비는 제주 방언으로 ‘가장 맛있는 돼지 생갈비’를 뜻하며, 이는 “소금만 쳐도 맛있는 돼지고기가 진짜배기”라는 그의 장사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 그도 처음부터 장사에 눈을 떴던 것은 아니다. 부산 진구 출신인 그는 돈 벌러 나간 아버지를 대신해 할머니 손에서 여동생과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다. “모든 세대가 공용화장실을 쓰는 다가구 빌라에서 살았다”고 회고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동네를 돌며 폐지를 주우러 다녔다. 그런 상황에서도 야학하며 수능을 치고 서울권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게 시급 1300원을 받아가며 장사판을 떠돌게 된 계기가 됐다.

굉장히 아쉬웠을 텐데.

“고등학교 때 집이 어려워 학원에 다니지도 못했다. 그래도 친구들이 다들 공부를 잘해서 함께 다니다 보니 펜을 놓지는 않았다. 수능도 봤다. 등록금 납부 기한을 앞두고 아버지께서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하시더라. 여기선 무엇을 해도 안 되겠다는 절망에 마늘 공장에 들어가 두 달 동안 70만원을 벌어 옷가지만 챙겨서 인천으로 올라갔다.”

왜 인천으로 갔나?

“친한 친구들이 인하대에 여러 명 들어갔다. 함께 지내려다 보니 자연히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에 달방을 잡게 됐다. 인하대 후문에 있는 음식점이나 호프집, 바에서 낮이고 밤이고 일만 했다. 월세에 밥값 내고 고향에 소액이라도 부치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군대도 방위산업체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제대 후에도 주야간으로 돈을 벌었고, 주말에는 웨딩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 26살이 돼서 이렇게 살아봐야 하루살이 수준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돈을 제대로 벌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서점에서 살았다.”


“가장 큰 스트레스는 직원 관리”


서점에서 살다니? 보통은 어떻게 취업할지 고민하는데?

“현실이 취업할 여건이 안 되지 않나.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참에 누가 어떻게 살아가라고 조언하는 것도 아니고, 아르바이트만 해서 멘토도 딱히 없었다. 그래서 서점에 있는 자기계발 부스에 가서 책들을 달달 읽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딱 두 개였다. 영업하거나 외식업에 뛰어들거나. 마침 친한 친구의 사촌형이 서울 압구정에서 고깃집을 차렸길래 친구에게 일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애초에 각종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그리 어렵진 않았을 것 같다.

“아니다. 그냥 서빙을 하고 손님 응대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는 시급만 바라보고 일하는 것이지만 이 길이 앞으로 내 수십 년을 좌우한다는 생각이 드니 본격적으로 장사 마인드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직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또 직원들 간에 트러블이 생기는 이유가 뭔지, 가장 적절한 해결법은 무엇인지 등등… 사실 장사를 하는 데 가장 큰 스트레스는 매출도 아닌 직원 관리다. 가족 간에도 마찰이 생기는데 생판 남인 직원들끼리 왜 없겠나?”

결국 사람에 대한 문제가 가장 크다는 건가?

“모든 스트레스는 사람 때문에 생긴다. 점장이 되고 나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직원 간의 갈등 해소다. 애초에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잘 맞을 수도 없고 외식업 장벽이 낮다 보니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갈등은 필연적이다.”

정재헌 대표만의 갈등 중재 방식이 있을 것 같은데?

“각자 입장을 듣고 공감하려고도 노력해봤고 서로 잘 풀게 하려고도 해봤지만 결론은 포지셔닝에 있었다. 시급 수준을 떠나서 각자 특화된 능력에 맞춰서 일을 분배하는 것이다. 누구는 가게 관리에 눈이 떠 있고 다른 누구는 손님 응대에 좀 더 자신 있다. 거기에 맞춰서 역할을 맡기고 나서 시간이 좀 흐르면 당초 불거졌던 갈등도 사그라든다. 그때 양측을 불러다 잘 풀어주면 거의 다 해결되곤 했다.”

들어보니 여러 프랜차이즈 업체 점장으로 활동하며 매번 전국 매출 1위를 기록한 경험이 있던데, 그건 용병술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지 않나?

“손님들에게 우리 매장이 좋은 기운을 느끼게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거기엔 당연히 직원들 간의 결속력도 포함된다. 모두가 억지로 시급이나 받을 겸 일하는 티가 나는 순간 손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거기다 잘되는 매장은 정갈하거나 깨끗한 인테리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아우라가 있는데, 다소 추상적이긴 해도 그걸 갖추는 게 중요하다. 손님 한 분 한 분에게 최선을 다해 응대하고 한 번 왔던 손님에 대한 인상, 스토리 등을 모두 메모하고 기억해서 2차 방문 때 환영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사실 아내도 그렇게 만났다. 매장 손님이었는데 유독 기억에 남아 재방문 때 최대한 잘 대했고 그 후로 연애하게 됐다(웃음).”

뒷골목돗갈비 정재헌 대표는 “지점마다 품질에 차이가 없도록 소금 간만 쳐도 맛있는 돼지고기를 손님들께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기웅 기자


돈을 제대로 벌어보겠다고 결심할 때 특정한 목표가 있었나?

“최대한 빨리 연봉 1억원을 찍는 거였다. 26살 때까지 월급 70만원에 불과했지만 목표는 높게 잡았다. 압구정에서 처음 모셨던 대표님은 그 얘길 듣더니 ‘열심히 하는 건 알겠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충고하더라. 하지만 그때는 그런 목표 없이 하루하루 동기 부여가 안 됐다. 얼마 뒤 그곳을 나온 뒤에는 서울에 막 진출한 돼지고기 프랜차이즈 강남점 점장으로 발탁됐다. 지금처럼 네이버를 통한 바이럴 마케팅도 활성화돼 있지 않은 시절이다. 현장에서 발에 땀이 나도록 일했다. 그리고 서른 살에 연봉 1억원을 기록했다.”


“잘되는 매장에선 손님도 좋은 기운 느껴”


사실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론 연봉을 높이는 게 쉽지 않은데?

“매출이 올라야 제 연봉도 오르기 때문에 잠을 줄여가며 일해야 할 근거는 충분했다. 그래서 저는 이사를 할 때도 매장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제일 싼 월세방을 찾는다. 지금은 결혼해서 자녀도 셋이나 있어서 옛날 얘기지만 한창 때는 그랬다.”

아픈 데는 없나?

“허리가 안 좋다. 매일 서 있어야 하는 데다가 주방에서나 테이블에서 허리를 숙여야 해서.”

외식업 말고 다른 사업을 해본 적은 없나?

“2017년경에 떡 사업을 했다. 그 일을 하기 전에 멘탈이 좀 흔들렸는데 본사로 이동해서 목표의식을 상실했을 때였다. 반드시 완수해야 할 매출 목표도 없고 일도 박진감이 없고 그런데 매달 돈은 벌고 그러니….”

밖에서 함부로 했다간 큰일 나기 딱 좋은 말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삶이 편했으니까. 이렇게 만족하고 살아도 되는 건가? 경각심이 들었다. 그래서 대표에게 사정을 말하고 그때 처음으로 창업에 대해 연구했다. 아이템을 찾다 보니 눈에 들어온 게 떡이었다. 떡은 우리 전통 음식인데 되게 진부하게만 돼 있어서 떡을 가지고 재밌게 풀어보면 좋지 않을까 해서 시작했다. 그래서 탄생한 게 조복남 떡집이다.”

조복남 씨가 누군가?

“제 할머니다(웃음). 사실 돈을 벌고 나서 할머니께 효도하고 싶었는데 노환이 오셔서 잘 챙겨드리지 못한 게 한스러워서 할머니 이름으로 했다.”

장사는 어땠나?

“정말 잘됐다. 서울 연남동 핫플레이스로 선정되기도 하고. 일단 저희는 떡부터 패키지까지 굉장히 세련되게 디자인했다. 렌틸콩으로 떡고물을 만들거나 쌀 100%가 아닌 피스타치오를 접목해서 반죽하기도 하고. 직접 매장 앞에서 떡메를 치는 퍼포먼스까지 보이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매장은 10평도 안 되는 한 군데였는데 연 매출 10억원을 기록했으니까. 거기다 롯데·현대·신세계 백화점에 팝업 스토어로도 들어가고 승승장구해서 아예 공장까지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올스톱하게 됐다는 얘기로 들린다.

“코로나19가 터졌다. 그때 느낀 절망은 외식업 하는 분들은 다 공감하실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데 내가 왜 망해’라는 마인드였지만 자연재해 앞에서는 전부 무용지물이더라. 그때 1997년 IMF 사태가 나서 아버지가 저와 동생을 부둥켜안고 서럽게 우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아버지 마음이 그제야 이해됐다. 저도 애가 셋이니까…. 떡 사업을 접고 마냥 쉴 수만은 없어서 매일 아침 6시에 1시간 정도 그냥 뛰었다. 그러고 나서 원래 다녔던 프랜차이즈 대표에게 찾아가 다시 일하겠다고 했고 코로나19로 하루 손님 두 팀만 오는 매장을 맡게 됐다. 그때 초심으로 돌아가 좋은 기운이 감도는 매장으로 탈바꿈하고자 노력했다. 그게 잘돼서 매출을 4배 이상 올렸고 저로서도 다시 한번 외식업에 확신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그 후에 뒷골목돗갈비를 창업했다.”

뒷골목돗갈비의 돼지고기. 최기웅 기자


본인만의 좌우명이 있나?

“대한민국이 망해도 삼겹살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제 프랜차이즈 사업을 확장하는 단계다. 어떤 전략을 구상 중인가?

“준비 단계다. 저는 점주께서 열심히만 하면 충분히 매출을 올릴 수 있는 프랜차이즈를 구축하고 싶다. 그런 구조가 안정화되려면 우선 본점과 직영점의 시스템이 확실하게 갖춰져야 한다.”


“노동에 대한 보람 느끼지 않고선 성공할 수 없다”


바이럴 마케팅을 통해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곳도 많은데?

“그것도 물론 하나의 수단이다. 하지만 프랜차이즈 확장은 바이럴 마케팅만으로 되지 않는다. 네이버 블로그나 플레이스에 수십, 수백 개 리뷰가 달리면 물론 좋겠지만 그것은 단기 효과에 불과하다. 그런 방식으론 결국 매장마다 맛의 차이나 서비스 측면에서 현저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시간이 흐를수록 도태되는 매장이 하나둘 속출하며 다 같이 저점의 늪에 빠지게 된다. 제 목표는 뒷골목돗갈비 어느 매장을 가더라도 소금만 쳐도 맛있는 고기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창업하는 데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매장을 열고 나면 매출이 곧 자기 돈이라고 생각하는 점주들이 있다. 하지만 매출은 말 그대로 매출일 뿐이다. 거기엔 부가세부터 인건비까지 다 포함된다. 그걸 온전히 써도 된다고 착각하는 순간 유흥비나 외제차 구입에 쓰고는 통장 잔고를 바닥내게 된다. 그런 분들의 공통점이 매출 회복을 위해 인건비를 줄이고 그러다 식자재 비용을 줄이는데, 그게 다 매장의 좋은 기운을 스스로 몰아내는 행동이다. 손님들은 어떻게 알고서는 그런 매장을 기피하고 점주는 결국 폐업 수순을 밟게 된다.”

외식업 프랜차이즈 창업과 직장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30대가 많다.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면?

“무슨 일이든 성공하려면 자기 수고가 99%다. 그런데 요즘 트렌드를 보면 수고를 하지 않고 돈 버는 걸 원한다. 무인숍, 비트코인, 주식 단타 등이 다 그렇다. 물론 거기서도 이익을 내는 분들도 있지만 거의 다 폭망에 폭망을 거듭한다. 창업이든 직장이든 쉬운 것만 하려고 하면 안 된다. 무엇을 선택하든 노동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 않고선 성공할 수 없다.”

-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ahn.deokkwan@joongang.co.kr / 사진 최기웅 기자 choi.gi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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