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속 텔레비전의 위력, 이 정도였다니!

김종성 2024. 10. 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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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정년이>

[김종성 기자]

1956년에 어머니 몰래 목포에서 상경한 tvN <정년이>의 윤정년(김태리 분)은 여성 극단인 매란국극단의 오디션을 간신히 통과한 뒤 자신의 제1회 공연인 <춘향전>에서 방자 역을 성공적으로 소화해낸다. 하지만, '극단 밖에서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단장 강소복(라미란 분)의 엄명을 어기고 고급 다방에서 노래 공연을 하다가 극단에서 퇴출된다.

갑자기 오갈 데 없어진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노래 선생님을 소개하면서 대중가수의 영역으로 이끌고자 하는 인물이 방송국 프로듀서인 박종국(김태훈 분)이다.

20일 방송된 제4회에서 박종국이 방송국 구경을 시켜주면서 "이 안에서 방송을 만들면 각 가정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송출이 되는 거야"라고 알려주자, 정년은 "아따, 그라믄. 지가 여기서 노래를 부르믄 그게 고대로 나가게 되는 거여라?"라며 신기해 한다.

정년은 자기 노래가 TV를 통해 사방으로 퍼져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신종 물건을 시청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고 궁금해 한다. "근디 안즉 라디오도 없는 집이 많은디 텔레비전은 몇 집이나 갖고 있을랑가요?"라고 물어본다.

박종국이 "아직 많지는 않지"라며 "수상기 하나 값이면 쌀 몇십 가마를 살 수 있느니까"라고 대답하자, 정년은 깜짝 놀라 탄성을 지른다. "아니, 아, 그라믄 방송을 한다 해도 볼 사람이 없겄네요"라는 말로 실망감을 드러낸다.

신문 기사로 예측해 본 텔레비전 가격
 tvN <정년이> 관련 이미지.
ⓒ tvN
 tvN <정년이> 관련 이미지.
ⓒ tvN
1956년 5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 '상식(常識) 텔레비죤'은 위 대화가 있은 시기의 텔레비전 가격을 알려준다. 텔레비전 수상기에 들어가는 장식이 많아 이 시기의 8인치가 지금의 8인치보다 훨씬 크고 무거웠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할 기사다.

"가격에 있어서는 스크리인의 대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보통 한국 가정에서는 8인치 반이 방의 크기에 비해 가장 적당하리라고 한다(가격은 14-5만환)."

위 신문의 그해 1월 29일자 3면 우상단에 따르면, 1월말의 서울 시내 쌀값은 가마니당 1만 환을 돌파했다. 동년 11월 27일자 <경향신문> 3면 우상단에 의하면, 11월 26일의 서울 시내 쌀값은 1만 8000환 정도였다. 연초를 기준으로 하면 쌀 15가마니 정도를 줘야 텔레비전을 살 수 있고, 연말을 기준으로 하면 쌀 8가마니 정도를 줘야 살 수 있었다.

당시의 쌀 1가마니 값을 지금의 쌀 1가마니 값으로 환산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쌀의 가치나 희소성이 지금보다 훨씬 높을 때였으므로, 지금의 쌀값으로 환산한 뒤에 가중치를 더해야 당시의 쌀값에 근접할 수 있다. 1974년 10월 20일자 <조선일보> 7면 중하단에 소개된 손수천 경장이 처음 경찰이 됐을 때인 1949년에 받은 월급은 쌀 1가마니에 상응했다. 쌀의 값이 아닌 가치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수상기 하나 값이면 쌀 몇십 가마를 살 수 있느니까"라는 말에 윤정년이 깜짝 놀라는 장면이 당시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종국은 그런 윤정년을 달래며 장밋빛 전망을 심어준다.

"미래를 내다봐야지, 정년아. 머지 않아 텔레비전 시대가 올 거야. 이 방송을 보려고 거리가 텅 비는 날이 올거고, 너도 나도 방송에 나가고 싶어서 환장하는 날이 올거라고. 국극을 하면 극장에 오는 사람만 네 노래를 들을 수 있지만, 카메라 앞에 서면 전국에서 다 네 노래를 들을 수 있어."

두 사람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가상의 인물인 윤정년을 비롯한 1950년대 중반의 한국인들은 TV의 위력을 쉽사리 예측하기 힘들었다. TV가 만들어낼 기술혁신이 여성국극의 존립 기반을 뒤흔드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인 생활의 곳곳을 변화시키리라고는 전망하기 힘들었다.

TV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변화
 tvN <정년이> 관련 이미지.
ⓒ tvN
TV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변화 중 하나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윤정년과 박종국의 대화가 있은 지 몇 년 뒤부터 대중의 생활 속으로 파고든 TV는 처음에는 개인과 마을공동체의 친밀성을 높여줬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개인과 가족의 친밀성을 높여주면서 개인과 마을공동체의 친밀성을 떨어트리는 기능을 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개인과 가족의 친밀성까지 떨어트리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런 흐름이 2018년에 <커뮤니케이션 이론> 제14권 제4호에 실린 부산대 채백 교수 및 최창식·강승화·허윤철의 공동논문에 이렇게 정리돼 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TV는 마을의 이웃들을 불러모으며 이웃 공동체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TV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각 가정의 안방을 차지한 TV는 가족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가정용 TV의 확산은 가족주의의 강화에 기여하였지만, 동시에 이웃과의 교류를 감소시켜 마을공동체 약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는 산업화 과정에서 이농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나타난 유동적 사회화 추세와 맞물리며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로는 TV 복수 소유가 점차 확대되고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 확대로 TV의 시청도 개인화된 형태가 늘어나고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1965년에 가구당 TV 보급률은 0.6%였다. 1000가구 중에서 여섯 집에만 TV가 있었으므로, 이 여섯 집은 집주인 인심이 박하지 않다면 동네 극장이 되기 쉬웠다. 1975년에는 그 비율이 30.3%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의 집에 가서 TV를 봐야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TV 보급이 확산돼, 웬만하면 남의 집 신세를 질 필요가 없게 됐다. 보급율이 가구당 112%가 된 것은 1995년이다. TV 드라마를 구경하기 위해 더 이상 다른 집이나 주인집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은 1990년대다.

이처럼 대중을 TV 수상기 앞으로 끌어당긴 힘은 무엇보다 재미다. 뉴스를 보기 위해 남의 집에 가는 사람보다는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를 보기 위해 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TV가 주는 정보보다는 재미가 대중을 더 많이 끌어당겼다고 할 수 있다.

그 재미를 찾기 위해 대중은 마을이나 이웃과 '전략적'으로 가까워지기도 하고 가족과 친밀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남과 함께 TV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TV가 많아지는 동시에 그 TV가 스마트폰 속으로까지 들어가게 되면서, 이제는 자기 방이든 교통수단이든 식당이든 어디서든지 나홀로 재미를 추구할 수 있게 됐다.

TV를 구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윤정년의 시대에는 이 물건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줄게 될지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윤정년처럼 여성국극의 인기를 좇아 국극배우로 데뷔했던 예술인들이 머지않은 1960년대부터 내리막길을 걸은 것은 이 당시로는 TV가 주는 재미의 위력을 가늠하기 힘들었던 데도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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