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파병은 악의 거래"…독재국가만 도왔던 北 '군사 외교' [이철재의 밀담]

이철재 2024. 10. 27. 05: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러시아ㆍ우크라이나 전쟁에 병력을 보낸 사실을 미국과 나토(NATOㆍ북대서양조약기구)도 확인했다. 현재 러시아로 이동한 북한 병력이 3000여명에 달하며, 12월까지 규모가 1만명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는 이르면 27일 북한군이 실전에 투입될 것으로 관측했다.

러시아 독립 언론기관 '아스트라'가 22일 공개한 동영상.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제127자동차소총사단 예하 44980부대 기지에 북한군이 도착한 장면이라고 한다. 텔레그램 채널 캡처=연합


특히 파병 북한군의 대부분이 입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0~20대라는 평가가 나왔다. 김정은이 정권을 지키려고 앳된 청소년을 총알받이로 팔아넘긴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북한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개입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북한은 1970년대 해외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또 베트남 전쟁과 중동 전쟁에 참전한 사실이 있다. 다만 대규모의 지상군을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오경필 중사의 해외 경력

2000년 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는 판문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남북의 군인들 사이에 벌어진 비극을 다룬 영화다.

송강호가 열연한 '공동경비구역 JSA'의 북한군 오경필 중사. CJ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주인공인 한국군 이수혁 병장(이병현)과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가 친해진 계기는 비무장지대(DMZ)에서 이수혁 병장이 지뢰를 밟아 꼼짝 못 하고 있을 때 오경필 중사가 지뢰를 해체해주면서다.

오경필 중사가 침착하게 지뢰를 해체할 수 있었던 배경엔 그의 해외 군사고문단 경력이 있다. 그는 JSA 총격 사건을 조사 중인 중립국감시위원회의 소피아 장 스위스군 육군 소령(이영애)을 병원에서 만날 때 소피아 장 소령이 자신 얼굴의 상처를 쳐다보자 이렇게 말했다.

리비아에서 테러당한 겁니다. 아랍 칼이 스치고 지나갔죠. 애굽(이집트)에선 지뢰 파편을 총창(총검)으로 파낸 적도 있습니다.

이수혁 병장이 오경필 중사와 북한군 전사 정우진(신하균)이 근무하는 초소로 처음 넘어간 장면에서였다. 이수혁 병장이 권총을 가지고 장난치자 오경필 중사가 이렇게 말했다.

" (오경필)사람 싸 봤어? "
" (이수혁)아니요. "
" (오경필)난 몇 번 해봤어. "
그러자 정우진이 옆에서 거들었다.

" (정우진)우리 중사 동지 아프리카고 아랍이고 죄 다니면서 군사 교관만 십년…. "
박찬욱 감독은 나중에 산문집 『박찬욱의 몽타주』에서 이렇게 썼다.

" 사실은 이수혁(이병헌)도 죽지 않는 결말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사건 후 5년, 민간인이 된 수혁이 비행기를 타고 나이로비로 갑니다. 다시 군사 교관이 되어 아프리카에서 활약하고 있는 경필(송강호)을 만나기 위해…. "


제3 세계에 무기와 함께 보낸 북한 군사고문단

북한은 대남혁명을 완수하려면 국제혁명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고 제3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전방위 ‘군사외교’를 폈다. 무기거래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군사고문단을 보내 반미ㆍ반제국주의 투쟁의 우호세력을 넓히려 했다.

김경진 기자


그러면서 김일성 시대였던 1970~1980년대 중동과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에서 북한 군사고문단이 활동했다. 송강호가 연기했던 오경필 중사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2009년 비밀해제된 1984년 8월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북한의 해외 활동’ 보고서에 따르면 1983년 현재 20여개 국가에 최소 450명의 북한 군사고문단이 나가 있었다. 북한의 해외 군사고문단은 1975년 자이레에 보낸 게 처음이었다.

북한 군사고문단은 북한이 팔았던 무기의 사용법을 가르치거나 주재 국가의 대통령 경호대를 훈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주로 로버트 무가베(짐바브웨), 밀턴 오보테(우간다)와 같은 독재자들이 북한에게 경호대 훈련을 맡겼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자금은 김씨 일가의 통치 자금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아메리카의 그레나다에서 1979년 쿠데타로 집권한 모리스 비숍은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려고 소련과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친분을 쌓는다. 비숍은 북한에게도 손을 내밀었고, 양국은 군사고문단 파견을 논의하고 있었다.

1983년 10월 25일 미국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레나다를 침공했다. 작전명 ‘긴급한 분노(Operation Urgent Fury)’. 이때 북한 군사고문단은 그레나다에 없었다. 자칫 미국과 북한이 교전할 뻔했다.

아프리카의 모잠비크는 1982년 북한의 군사고문단을 받아들였다. 북한 군사고문단의 훈련을 받은 모잠비크 특수여단은 반정부 세력인 모잠비크 민족 저항 운동(RENAMO)를 진압하는 데 동원됐다.

마다가스카르에선 북한 공군 전투기 조종사와 정비사, 관제사 등 50여명의 군사고문단이 1978년부터 마다가스카라 공군의 미그-17 4대를 직접 운용했다. 소련은 나중에 미그-21을 마다가스카르에 제공했는데, 이 전투기들도 북한 군사고문단이 몰았다.

아프리카 인도양의 섬나라 세이셸에선 1981년 용병 집단인 와일드 기스(Wild Geese)가 쿠데타를 모의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세이셸은 1983년 56명의 북한 군사고문단을 초청해 자국군을 훈련했다.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의 오경필 중사의 대화에서처럼 북한 군사고문단은 주재 국가의 군대를 조련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교전에 뛰어들었을 수 있다. 러시아 타스 통신에 따르면 2016년 내전 중인 시리아에서 철마-1, 철마-2 등 북한군 2개 부대가 정부군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시리아 반군은 북한 부대를 “매우 위험한” 존재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전투 부대라기보다는 군사고문단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인 이미 2013년 전투기 조종사를 보냈고, 2014년엔 미사일 관련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시리아 정부군을 돕고 있었다.

북한은 또 PLO, 적군파 등 국제적 테러단체를 훈련하거나 무기를 제공하는 등 테러의 온상 역할을 자처했다.


1966년 베트남 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북한군 조종사

북한의 첫 해외 파병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한국은 1964년 9월 11일 비전투 부대를 시작으로 65년 10월 3일부터 육군 2개 사단, 해병 1개 여단 등 전투 부대를 월남(남베트남)에 보냈다. 주월 한국군은 1973년 3월 23일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베트남 하노이 북동쪽 박동의 북한군 묘지. 정용수 기자


북한도 이에 대응했다.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 직후 베트남 전쟁이 확전하자 북한은 월맹(북베트남)에 공병을 파견했다. 북한은 6·25 전쟁부터 미국 공군의 공습을 피하려고 지하 갱도를 파는 데 열중했다. 월맹에 그 기술을 전수해준 것이다.

또 한국이 전투부대를 보내자 주변 지역에서 북한 심리전 부대가 활동했다.

1965년 북한의 관영 매체에선 북한 인민이 월맹에 ‘지원군’으로 가겠다는 탄원했다는 보도가 자주 보였다. 참전에 앞서 밑밥을 깔아두는 조처였다.

김일성은 1966년 10월 19일 북한 공군 제203 부대를 찾아 전투기 비행사들에게 베트남 파병은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의미가 크다면서 ▶숭고한 국제주의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사회주의 나라들의 단결을 강화하며 ▶미제(미 제국주의)를 약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조선 혁명(적화통일)을 위한 싸움준비 차원에서 실전경험을 쌓아야 할 필요성도 강조했다.

북한의 베트남 참전은 이미 결정됐다. 그해 6월 월맹이 파병을 요청했고, 북한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비상회의에서 이를 승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해 9월 24일~30일 북한군 대표단이 월맹과 파병 문제를 협의한 뒤 협정을 체결했다. 김일성은 10월 19일 파병 부대를 격려한 것이었다.

베트남 측 기록에 따르면 북한 공군은 1966년 10월 20일 월맹에 파병됐고, 그해 12월 15일 첫 교전을 치렀다. 이들은 1969년까지 월맹에 주둔했다고 한다. 종전 직전인 1974년까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북한 공군 파병 부대 규모는 1개 비행연대다. 1개 연대는 3개 비행중대로 돼 있고, 1개 비행중대는 10대의 전투기를 보유했다. 베트남 측 기록엔 384명의 북한 공군이 파병됐고, 그중 전투기 조종사는 96명으로 돼 있다. 그러나 연인원 800명의 전투기 조종사가 베트남에 갔다 왔다는 탈북자 증언이 있고, 역시 탈북자 출신인 고 이웅평 공군 대령은 베트남 참전 경력 북한군 조종사가 모두 203명이라고 밝혔다.

북한 공군의 미그-21. 북한은 이 전투기로 베트남과 중동에서이 전쟁에 참전했다. 이 구식 전투기는 아직도 북한 공군의 주력이다. 조선중앙통신


여기에 지휘관, 참모요원, 정비사, 관제사, 군수지원 요원, 의료 요원이 따라갔고, 북한군 특유의 정치 장교와 보위부 요원도 있었다. 이밖에 파병·전투를 기록하고 촬영하는 요원, 미군 교신 내용을 통역하는 요원, 베트남어 통역 요원 등도 있었을 것이다. 최소 1000명 이상이 참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적극적으로 싸웠으나 나중엔 소극적으로”

북한 공군은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 북서쪽 노이바이 비행장에 주둔했다가 1967년 8월께 하노이 북서쪽 캡 비행장으로 옮겼다. 이곳은 하노이와 항구도시 하이퐁과 가까웠다. 하노이와 하이퐁은 미군의 핵심 공습 목표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북한 공군은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함재기나 미 공군의 B-52 폭격기를 주로 상대했다. 미군 측 기록에 따르면 1967년 4월 19일 북한 공군의 미그-17 8대가 확인됐고, 그해 4월 24일 미군 전투기 1대가 북한 공군에 피격됐다.

북한 공군은 공중에서 매복한 뒤 B-52와 호위기를 기습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하면서 어느 정도 성공적 전과를 거뒀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센터에 따르면 1967~69년 북한 공군이 미군기 26대를 격추했다.

김일성은 1967년 5월 30일 북한 공군이 미군기 10여대를 격추한 것을 축하하는 전문을 보냈다. 1969년 5월 28일 북한 공군의 미그-17 8대가 미군 F-4 팬텀Ⅱ 12대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북한은 이를 기념해 제528 비행연대를 창설했다.

하노이 북동쪽 박동의 묘지엔 북한 공군 전사자들이 묻혔다. 이곳의 북한 전투기 조종사 묘는 모두 14기다. 이곳 묘비엔 한글과 베트남어로 이름·출생지·출생일·희생일이 쓰여 있다. 시신을 수습한 뒤 매장한 숫자가 14명이니 실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전사자를 포함하면 전체는 14명을 넘었을 것이다. 고 이웅평 공군 대령은 67명이 사망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80명 이상이란 증언도 있다.

묘비를 보면 전사자는 1967년 3∼10월 사이에 집중됐고(12명), 1968년 2월 12일(1명) 이후론 전사자가 없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북한의 베트남전쟁 참전』은 북한 공군이 참전 초기 “하노이 상공을 평양처럼 방어하라”는 김일성 지시를 적극적으로 따랐지만, 시간이 가면서 소극적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공군의 베트남 참전을 숨기다가 2002년 9월 18일 인민무력부 김양점 부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유해 인수를 위해 베트남으로 출발했다는 관영 매체의 보도로 이를 공식 확인했다.


이스라엘과 무승부였다지만, “다수 전사”라는 의견도

북한 공군은 또 한 번의 실전 경력을 해외에서 쌓았다. 이번엔 중동에서였다.

이집트에 파견된 북한 공군 전투기 조종사와 지상 요원이 이집트 공군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집트 공군


사드 엘샤즐리 이집트군 총참모장은 1973년 4월 1일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한다. 그해 6월 북한은 전투기 조종사 20명, 관제사 8명, 통역 5명, 행정 요원 3명, 요리사 1명, 의사 1명, 정치 군관 1명 등으로 짜여진 분견대를 이집트로 보낸다.

그해 8월 15일(이하 현지시간) 이스라엘과 미국은 관련 정보를 입수했다고 발표했다. 물론 이때도 북한은 철저하게 날조했다는 비난을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퍼부었다. 이스라엘은 북한 조종사의 교신을 감청하려고 한국어 통역 요원을 양성하기도 했다.

북한 공군 파견대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 인근에 배치됐으며, 카이로 방공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해 10월 6일 이집트는 남쪽에서, 시리아는 북쪽에서 이스라엘에 쳐들어갔다. 제4차 중동전쟁의 개전이었다. 전쟁이 한창 중이던 10월 18일 윌리엄 비처 미 국방부 대변인은 “최근 24시간 안에 이집트 공군으로 위장한 북한 공군의 미그-21이 카이로 남쪽에서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와 도그파이트(근접전)를 벌였고, 양측의 피해는 없었다”고 말했다.

전쟁은 그해 10월 25일 끝났다. 김일성은 나중에 북한 공군이 중동에서 무사히 임무를 마쳐 다행이라고 적었다. 전사자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존 K. 싱글러브 유엔군사령부 참모장이 1976년 한씨 성을 가진 북한군 장군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한 장군’이 “욤키푸르 전쟁 때 이집트 대사관 무관이었는데, 당시 북한 공군 미그-21 조종사가 미국이 제공한 사이드와인더 공대공 미사일 때문에 이스라엘 전투기에 격추돼 다수가 전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자서전 『위험한 의무(Hazardous Duty)』에 썼다.

이스라엘 측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 공군 F-4 4대가 종전 후인 1973년 12월 6일 수에즈 운하를 초계 비행하던 중 이집트 공군 미그-21 2대와 만났다. 이집트 미그-21 1대가 도망갔고, 나머지 1대는 이스라엘 F-4 2대와 교전했다. 이집트 미그-21은 교묘한 기동으로 이스라엘 F-4와 2대1 공중전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이스라엘 F-4 2대는 AIM-9 사이드와인더 3발을 발사했지만, 이집트 미그-21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이스라엘 F-4 편대는 연료 부족으로 기지로 돌아가는데 이집트 미그-21이 이집트 지대공미사일에 격추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중에 이집트 미그-21의 조종사가 북한 공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밀리지 않은 솜씨로 봐 베트남 참전 조종사인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북한은 시리아에도 전투기 조종사를 파견하려 했으나, 종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의 워싱턴 연구소에 따르면 북한은 1966년 시리아와 수교를 맺은 뒤 바로 전차 승무원과 지대공 미사일 기술자를 시리아에 지원했다.

레바논 헤즈볼라 땅굴(왼쪽)과 북한 땅굴 비교. 이스라엘 알마 연구소


중동에서 북한의 군사 개입 사례는 최근도 발견된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지난해 10월 9일 이스라엘 남부를 공격했을 때 북한산 7호 발사관(RPG-7)을 사용했다. 하마스와 현재 이스라엘이 교전 중인 레바논 무장 정파인 헤즈볼라는 북한의 기술을 배워 자체 땅굴망을 만들었다.


중동이 씨 뿌린 북한 미사일, 최대 위협으로 자라나

북한은 베트남과 중동 참전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김정은이 17일 시찰한 중요국방공업기업소에서 생산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8형 발사차량들. 연합


북한 공군은 베트남 참전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전투기 조종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베트남 현지서 촬영한 공중전 영상은 교재로 활용됐다. 북한 공군은 베트남 참전 부대를 중심으로 528 비행연대를 창설한 뒤 황해도 국산 기지에 배치했다.

북한 공군은 사령부 산하 ‘전쟁연구소’를 만든 뒤 베트남 참전 조종사뿐만 아니라 중동 참전 조종사도 이곳에 배치해 비행전술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다른 조종사에게 교육하고 있다.

북한 공군은 또 베트남에서 항공유격전 전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에서 사용했다는 유격전을 공중전에 대입한 개념으로, 레이더를 피해 저공에서 매복하다 적기 아래에서 급상승한 뒤 기습하는 전술이다. 북한 공군은 1969년 4월 15일 동해에서 미 해군의 전자전 정찰기 EC-121을 항공유격전으로 격추했다.

이집트는 감사의 표시로 소련에서 수입한 스커드-B 단거리탄도미사일을 1976년께 북한에 보냈다. 북한은 이를 분해하면서 분석하는 역공학을 통해 탄도미사일 기술을 확보했다. 1986년 자체 생산한 스커드-B(화성-5형·300㎞)를 실전배치한 데 이어 1992년 사거리가 더 긴 스커드-C(화성-6형·500㎞)를 실전배치했다.

이처럼 한반도의 가장 큰 위험 요소인 북한의 핵·미사일 중 탄도미사일의 발원지는 중동이었다. 이때 자라나기 시작한 북한의 탄도미사일 기술은 이제 장거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으로 컸다.

1988년 CIA 보고서에 따르면 이집트는 1983년 북한에 탄도미사일 기술을 제공해달라며 스커드 미사일을 상당 액수의 개발자금과 함께 보냈다. 이집트는 북한 기술로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시작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집트는 북한 좋은 일만 해준 셈이었다.

또 북한은 ‘군사외교’ 덕분에 한동안 국제 무대에서 제3 세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북한의 파병은 악의 거래…좌시해선 안 돼”

이처럼 북한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해외로 군대를 자주 보냈다. 북한의 군대를 환영한 나라는 모두 독재국가이거나 공산국가였다. 그리고 파병 과정에서 북한 인민은 철저하게 소외됐고, 이익은 거의 모두 김씨에게 돌아갔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일 김정은 총비서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날 단독회담을 개최한 사실을 보도했다. 신문은 "무려 2시간을 마주하시고 중대한 문제들을 토의했다"면서 "회담이 끝난 후 김정은 동지는 푸틴 동지에게 우리나라 방문을 기념하여 선물을 전해드리시었다"라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rodongphoto@news1.kr


그러던 북한이 이번엔 우크라이나에 발을 디뎠다. 박용한 한국국방연구원(KIDA) 선임연구원은 “한국을 침략한 북한과 우크라이나를 쳐들어간 러시아가 손잡은 것은 전형적인 ‘악의 거래’”라면서 “이들이 야합하면 곧 한반도에 악의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 분명하다. 절대로 좌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의 단호하면서도 현명한 대응이 절실한 때다.

이철재 국방선임기자 seajay@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