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소송은 좋은 사회를 위한 가장 겸손한 기여 [내 인생의 오브제]

2024. 10. 26. 23:2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1) 이정훈 서울반도체 대표의 WSJ 광고
이정훈 서울반도체 대표가 낸 월스트리트저널 전면 광고.
지난해 12월 19일 미국의 유력 경제지인 월스트리트저널에 마치 암호 숫자를 나열한 것 같은 독특한 전면 광고가 실렸다. 숫자 중간을 파고 새긴 글귀가 아니었으면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짐작조차 못할 광고였다.

이렇게 쓰여 있다. “출생은 공정하지 않다. 그러나 기회는 공정해야 한다.” 일종의 제목인데 이것만 봐서는 가늠이 안 되고 다음 좀 작은 글씨체의 문장에 가서야 의도가 드러난다. ‘특허’였다. “특허는 젊은이들과 중소기업에 공정한 기회를 제공한다. 특허는 18세기 이후 산업혁명을 촉발하여 절대빈곤율을 85%에서 10%로, 영아 사망률을 43%에서 3%로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 광고주가 특허에 얼마나 간절한가를 나타내는 문장이 이어진다. “지난 20년간 우리는 8개 국가, 100개가 넘는 (특허) 소송에서 승리했다. 소송은 보다 좋은 사회를 위한 우리의 가장 겸손한 기여”라고.

이 광고를 낸 인물은 바로 이정훈 서울반도체 대표다. 암호 숫자처럼 나열된 것은 무려 1만8000개에 달하는 서울반도체의 특허. LED(Light Emitting Diode·발광다이오드) 업계에서는 세계 최다, 압도적 특허다.

대학(고려대) 때는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그 후 대학원 미국 유학 시절 경영학을 전공해 자동차 부품 업체인 삼신전기에서 부사장까지 지낸 이정훈 대표. 나이 마흔에 결단의 순간이 찾아온다. 1992년 ‘무어의 법칙’으로 유명한 미국 반도체 회사인 페어차일드 출신의 엔지니어들이 설립한 서울반도체가 경영난을 겪으면서 시장에 매물로 나오자 이 회사 인수에 나섰다. 청색 LED가 개발되기 전인데 그는 여기서 미래의 희망을 본 것이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인생 후반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서울반도체 인수 후 원칙을 하나 세웠다. 크든 작든 회사 매출의 10%를 R&D에 투자해 특허를 쌓겠다고. 거대 기업과 상대하려면 특허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30년간 1만8000개의 특허를 보유하게 된 서울반도체. 2005년 그는 운명적 사건과 마주한다. 세계 1위 LED 기업인 일본 니치아화학공업에서 특허 경고장이 날아온 것이다. “우리 특허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라, 더 이상 무단 사용하면 소송에 들어갈 것”이라고. 이 대표는 이 위기를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 한판 붙어보자.” 그는 특허 전쟁에 매달린다. 그러는 사이 소위 LED 분야에서 5대 봉우리라는 기업 모두가 이 한국의 작은 기업을 상대로 소송전을 벌였다. 판이 커진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주위 모든 사람들이 만류했다. 적당히 타협하라고. 그는 큰 전쟁에 대비해 진지를 구축했다. 50여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특허 자문단을 만들고 특허전에 무려 600억원이나 되는 돈을 쏟아붓는다. 그러고는 회사의 사활을 건 전투에 돌입했다. 1차로 꺾어야 할 상대는 일본의 니치아. 무려 3년을 끈다. 그러고는 결국 서로 특허를 공유하는 영구 크로스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다. 그는 소송전이 진행되면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니치아가 타협하고 물러선 날, 그는 어깨까지 자란 머리를 자른다. 이 사건 이후 업계에서는 그를 ‘특허 독종’이라고 불렀다. 그 후 이어지는 승전보. 백전백승.

4년 전에는 최고의 브랜드 이미지를 지닌 필립스 LED 전구에 대해 역으로 소송을 걸어 3년간 필립스가 판 제품을 전부 회수해 파괴하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수비가 아니라 이제 공격. 대한민국 특허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사건이었다. 그는 2018년부터 다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언제 머리 자를 거냐”고 물으면 빙그레 웃는다. 아직도 전쟁 중이란 얘기다.

[손현덕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2호 (2024.10.30~2024.11.05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