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남한산성의 독립운동가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굴욕과 함께 연상되곤 하지만, 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됐던 것은 아니다. 인조 임금이 청나라군의 공세를 못 견디고 스스로 출성해 지금의 석촌호수인 삼전도에서 항복했을 뿐이다.
남한산성은 19세기 말의 일제 침략 때도 저항의 거점이 됐다. 2015년에 <동양학> 제59집에 실린 김명섭 당시 단국대 강사의 논문 '일제의 남한산성 침탈과 주민들의 저항 사례 연구'는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반포를 계기로 경기 지역 의병들이 봉기하여 남한산성에 연합의진이 구성"됐다면서 "일제는 남한산성 마을을 무력 점령하여 주둔하면서 항일 역량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고 기술한다.
남한산성에 대한 일제의 우려는 1907년 8월에도 대단했다. 고종황제 강제 퇴위로 경기도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부대를 파견해 남한산성을 선제적으로 공격했다.
위 논문은 그 부대가 그해 7월 일본에서 파견된 보병 제12여단 제14연대로 판단된다면서 "이 부대는 8월 22일 기병대를 광주군에 파견하여 무기 전부를 압수하고 탄약을 보관하는 화약고와 무기고를 폭파하였다"라며 "산성 안의 사찰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아 진행되었다"고 기술한다. 이 공격으로 인해 산성 내의 사찰 9곳 중 8곳이 전소됐다.
그뿐 아니었다. "일제는 1917년 광주군청을 경안리로 이전하여 300년간 행정 중심 역할을 한 산성마을을 퇴락시키도록 유도하였다", "일제는 남한산성 지역 주민들의 열띤 지원과 학생들의 향학열이 높았던 사립학교를 탄압하였다"고 위 논문은 기술한다. 매우 집요하게 남한산성을 짓밟았던 것이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석혜환 |
ⓒ 국사편찬위원회 |
여기서 그의 이름을 클릭하면, 47세 때인 1937년에 대전형무소에서 촬영한 사진과 함께 그가 1890년 10월 22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남한산성 마을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일제는 1890년 생으로 파악했지만, 1889년 생이라고 표시된 논문도 있다.
위 감시 카드는 그의 키가 158.5센티미터라고 알려준다. 이 키는 14~19세기에 출생한 한국 남성의 평균치다. 이 600년간 한반도의 농업생산성에 커다란 변동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감시 카드는 그의 신분이 상민(常民)이며 직업은 무직이었다고 알려준다.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는 신분제도를 운영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1910년과 1929년에 양반이나 유생인지 아닌지를 조사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석혜환은 평민이다.
해외 망명지나 대도시 객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경우에는 집안 배경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지만, 석혜환처럼 출신지에서 활동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더 중요했다. 감시 카드에 적시된 상민 신분만으로는 그가 고향에서 독립운동 지도자가 된 비결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향토서울> 제80호에 실린 조규태 한성대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경기도 광주 출신 석혜환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인용된 족보인 <충주 석씨 병사공파보>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무과 급제자이고 조·증조·고조부는 종2품에서 종1품의 고위 품계 보유자였다.
한편, 이 논문에 따르면 박광운 광주향토문화연구소장은 "석씨 집안은 광주 지역에서 대표적인 향리 집안"이었다고 진술했고, 충주 석씨인 석경징 전 서울대 교수는 "조선시대 말기에 석씨 집안이 납속으로 관계(官階)와 산직(散職)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 집안이 대표적인 아전 가문이었고, 특정 직무가 없는 관직이나 품계를 사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고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전통적인 양반 가문은 아니었다는 진술이다. 일제가 석혜환을 '상민'으로 파악한 것은, 두 학자의 진술에 무게를 실어준다. 그가 출신지에서 독립운동지도자로 부각된 데는 개인적 신념과 역량에 더해, 아전 가문의 영향력과 경제력 등이 작용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석혜환 |
ⓒ 국사편찬위원회 |
그는 34세 때인 1924년에 농민·노동자·지주·자본가를 규합해 광주노농산업장려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이 됐다. 이 단체가 지주·자본가에 치우친다고 판단되자 이듬해에는 농민·노동자 중심의 남한산노동공조회로 발전시키고 이들의 권익 옹호에 힘썼다.
1927년에는 국내 최대 민족주의단체인 신간회의 광주지회 설립을 주도하고 부회장이 됐다. 다음 해에는 산성리에 남한산노동공조회관을 짓고 야학 등을 운영했다. 이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고취"시켰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1928년인 그해에 신간회 광주지회장이 된 그는 1929년에 역사적 항일 파업인 원산총파업을 격려하는 전보를 발송한 일로 인해 체포됐다. 이 때문에 10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때까지 민족주의 관점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석혜환은 이 방식이 자본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제국주의 노선을 걷는 일본과의 투쟁에 부족하다고 판단하게 됐다. 이는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위의 김명섭 논문은 "3·1만세운동과 신간회 광주지회 활동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일부 산성마을 주민들은 1931년 5월 신간회가 전격 해소되자, 민족주의운동과 합법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점차 비합법 사회주의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설명한다.
그런 기류 속에서 석혜환은 일제에 타격을 가할 수단을 사회주의에서 찾게 된다. 일본 정부의 배후에서 한국 식민지배에 개입하고 이로부터 이윤을 취득하는 일본 자본가들에게 맞서고자 그들의 모순과 문제점을 파헤치는 접근법을 택했다.
위 논문은 일제 검찰 자료를 근거로 "남한산노동공조회를 운영해오던 석혜환은 1933년 12월 마을 동료인 구희서 등과 함께 이 단체를 광주공동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비합법 지하운동으로 전환하였다고 한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지역 여론에 기초한 이 투쟁 방식을 심화시켜 나갔다. 1935년에는 산성리에서 광주공산당협의회를 조직했다. 이것이 발각되는 바람에 1937년에 대전형무소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키가 158센티미터라는 사실이 노출됐던 것이다. 감시카드에 적시됐듯이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자였다. 이 명목으로 징역 3년을 살았다. 해방 이후에 친일파 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으로 계승될 치안유지법에 저촉돼 빨갱이 취급을 받게 됐다.
그의 인생은 55세 나이로 맞이한 해방 이후에도 굴절을 겪었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 가입한 그는 좌익 혐의자라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하게 된다. 이 때문에 전향자라는 굴레를 쓰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인민군 지원하에 광주군인민위원장이 된 그는 보도연맹 가입 전력 때문에 완장을 벗게 된다.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한 남한산성에서 지역 기득권층의 아들로 태어나 약자와 민족을 위해 인생을 바친 것이 그런 결과로 귀결됐다. 대한민국 국가보훈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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