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양봉길을 걸어온 사람들

라정진 2024. 10. 26.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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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출신 귀농 부부의 50년 양봉기2] 꿀벌을 위한 나라는 있다

[라정진 기자]

- 1편 멸종위기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키우는 벌 https://omn.kr/2aoyq에서 이어집니다.

생산시설과 사무실을 연결하는 복도 한 면에는 각종 수상 기록과 제품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고, 19세기의 양봉 책과 그때 그 시절 당시의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외알 안경을 쓰신 증조할아버지의 초상화는 여기에도 걸려 있는데, '지켜보고 있다' 느낌의 눈빛과 인자한 할아버지 얼굴이 모두 드러나 있었다. 프레데리쿠와 리타의 큰 아들도 같이 일을 하고 있으니, 5대째 양봉가다. 5대조 할아버지가 충분히 자랑스러워하시리라.
▲ 세라멜꿀 오렌지꽃꿀, 오크꿀, 밤꿀, 유칼립투스꿀, 히스꿀 등. 꿀냄새가 날 것만 같은 전시선반
ⓒ 라정진
드디어 시식 시간, 맛의 강한 정도와 진한 정도에 따라 테이스팅을 진행했다. 제일 처음 맛본 것은 야생 라벤더 꿀. 밝고 깨끗한 황금색의 상큼하고 향긋한 꿀이다. 아주 부드럽게 넘어가면서 기분 좋은 새콤함이 느껴진다.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만한 맛이고, 실제로도 가장 인기가 좋은 꿀이란다.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설탕이나 감미료 대신 많이 넣어 마신다고 한다.

두 번째 맛본 꿀은 오렌지 꽃꿀. 색깔과 톤은 야생 라벤더 꿀과 비슷한데, 향이 조금 더 느껴지고 새콤함과 상큼한 맛이 좀 더 있다. 리타 말에 따르면 진정 효과가 있는 아로마가 있어, 밤에 린덴티 혹은 카모마일 티에 타서 마시면 좋다고. 매끄러운 질감 덕에 베이킹과 디저트 만들기에도 딱이란다.

세 번째는 유칼립투스 꿀. 세 번째부터는 확실히 좀 더 꾸덕해지고 색깔도 진해진다. 새콤한 맛이 없지는 않은데 묵직해져서 그런지 앞의 꿀들처럼 잘 느껴지지는 않는다.

네 번째 꿀은 오크 꿀. 조금 전 벌집틀에서 직접 떠먹어 본 꿀인데, 이렇게 먹으니 맛이 또 다르다. 앞서 다른 종류의 꿀을 3개 맛본 후 다시 먹으니, 맛도 향도 다르게 느껴진다. 확실히 묵직하다.

마지막으로 맛본 것은 히스 꿀. CEO인 프레데리쿠가 제일 좋아한다고 한 꿀인데, 언덕을 보라색으로 가득 물들이는 야생 히스에서 채취한 꿀이란다. 어른의 맛이다.

인류의 잘못, 꿀벌 실종사건

한 번, 아니 두 번 더 먹고 싶다는 아이들을 만류한 후, 다시 밖에 나가서 뛰노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니 흔쾌히 벌떡 일어난다. 아이들은 역시 꿀보다도 뛰어노는 것이 좋은가 보다. 새삼 이곳 환경이 벌에게도, 아이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환경에 생각이 미치니 환경오염과 기후변화가 벌들에게 미치는 영향, 직접적으로는 군집붕괴현상(CCD Colony Collapse Disorder)에 대해 체감한 바가 있는지를 프레데리쿠에게 물어봤다. 의외로 담담한 답이 돌아왔다.

"제가 50년 동안 양봉가로 살면서 봐온 벌들은 아주 강하고 변화에도 잘 적응하는 생명체입니다. 인류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생존한 생명체로 환경에 잘 적응하죠. CCD가 보고된 곳은 주로 중부 유럽이나 미국으로 알고 있습니다. 산업 활동이 많이 발달된 곳입니다. 농작물 플랜테이션도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죠. CCD의 원인에 대한 여러 가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중에서 제 생각엔 벌들이 수분하는 농작물에 있는 각종 화학물질(농약, 제초제 등)과 전자파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 크지 않나 싶어요. 우리 벌통이 있는 말카타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매입하는 꿀은 보통 아주 외진 곳에서 납니다. 벌들이 전자파에 노출되려야 될 수 없는 깨끗하고 외딴 곳이죠. 파트너 양봉가들도 CCD에 대해선 딱히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포르투갈에선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진 이 문제가 크지 않은 것 같네요."

다행이다 싶었다. 한편으론 사람 없는 곳에 전자파도 없고, 농약도 없고, 그러니 벌들과 다른 생명체들은 안전할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에 '인류로서의 죄책감'도 조금 밀려왔다.

방문하기 전에 검색을 하다가 본 기사에서는 벌 뿐만 아니라 곤충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확인되는 곤충 종 중에 41%가 개체 수 감소가 보고될 정도라고. 왜? 그야 인간 때문에!

환경을 통제하는 집약 농업을 통해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는 개간, 산림, 숲 등 자연환경 훼손과 농약 사용은 필수. 여기에 기후변화까지 더해지니 곤충이 사라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산불 같은 재해의 영향과 생산량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생산량 역시 연도 별로 꾸준한 편입니다. 물론 벌과 자연에 의존하는 것이니, 똑같지는 않습니다. 농사처럼 잘 되는 해가 있고, 별로인 해가 있어요. 주밀원 별로도 좀 다르고요. 작년에는 야생 라벤더가 별로였는데, 생산량이 떨어지는 해에는 꿀의 색깔도 좀 탁한 것이 보입니다. 반면 오렌지 꽃꿀은 완전 최고였는데, 꿀이 무척 투명하고 맑은 빛깔을 보였죠.

사실 당연한 겁니다. 주밀원의 꽃이 적으면, 벌들은 다른 꽃들을 찾아 나가고 이를 채집하다 보니, 꿀의 톤도 어두워지는 거죠. 올해는 작년과 달리, 야생 라벤더의 성적이 좋습니다. 생산량도 질도 아주 좋아요.

산불이라... 당연히 걱정이긴 합니다. 산불이 나면 3~4년은 족히 필요하죠, 다시 밀원을 회복하기 전까진... 이 근처에도 몇 년 전 산불이 났는데, 다행히 아주 큰 규모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산불도 더는 번지지 않아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 양봉가의 집 사무실에서 아주 가까운 곳, 말카타 산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이 프레데리쿠와 리사의 집. 보이는 것은 나무와 덤불, 들리는 것은 새소리뿐.
ⓒ 라정진
벌도, 사람도, 기업도 모두 함께 일하는 것

살짝 무거운 분위기에서 화제를 돌렸다. 여러 나라에 수출하고 있는데, 반응이 어떤지?

"아주 좋습니다. 코비드 기간 동안 매출이 훌쩍 뛰었어요. 사람들이 꿀의 항바이러스 성분이나 면역증진 효과를 자연스럽게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세계대전중에 상처 감염 방지제나 치료에 천연벌꿀을 썼죠. 물론 그때의 의료 수준과 지금을 비교할 수 없지만, 천연 꿀이 가진 효과는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야 당연히 모두 꿀 애호가죠! 우유나 차에 타 먹는 경우가 제일 많고, 감기 걸렸을 때는 레몬과 꿀을 따뜻하게 타서 먹고요."

듣는 데 침이 고였다. 레몬 꿀, 우유 꿀. 다 너무 좋지요! 5대째 양봉 가문의 50년 업력 양봉가로서 포르투갈 꿀의 특별한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포르투갈의 꿀 생산량과 판매량은 어느 정도 일치합니다. 한편 독일과 러시아는 꿀을 많이 수입하고, 수출도 많이 해요. 여러 나라에서 꿀을 사들이고 가공합니다. 특정 나라의 꿀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여러 군데에서 수입하여 가공, 다시 수출하면 식품 안정성 차원에서 추적이 애매해질 수밖에 없어요. 투명성 확보가 어려워지는 거죠.

저희는 몇 대를 이어 양봉을 해왔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 오랫동안 알아온 동료 양봉가들이 있습니다. 벌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뻔히 알고요. 그곳의 환경도 알고 있습니다. 꿀 외, 우리가 생산하는 잼이나 그래놀라의 원물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국산, 가능하면 지역 내 농부에게서 삽니다. 깨끗하게 제대로 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깐요.

농부뿐만 아니고 직원이며 관계적 측면에서 지역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Food Bank against Hunger, Caritas, Portuguese League against Cancer 등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와 우리 활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어요. 이건 정말 아주 중요한 거예요."

제법 긴 대화와 견학을 마친 후, 자리를 옮겼다. 감사하게도 집에서 정성 가득한 점심을 대접해 주셨는데, 식당 겸 거실에서 내다보는 말카타 전망이 기가 막히다. 대가족답게 가족 사진과 옛날 사진이 곳곳에 걸려있다. 프레데리쿠가 옛날 사진 몇 개를 보여주며 아름답게 미소 짓는다. 앳된 청년 둘이서 짐을 가득 실은 당나귀 옆에 서 있다.

"이건 코르티수쉬 Cortiços 랍니다. 포르투갈이 세계적인 코르크 생산국인 건 알고 있죠? 그 코르크로 만든 포르투갈 전통 재래식 벌통이랍니다. 안쪽에 나무 받침대를 괴어 벌집틀을 지탱하죠. 아직도 기억나는데, 여기 시골마을의 노부인에게 이 재래식 코르크 벌통들을 샀습니다. 너무 나이가 드셔서 더 이상 벌들을 돌보실 수 없다고 하셔서, 벌과 벌통을 통째로 샀지요. 그리고 형과 함께 당나귀에 벌통을 싣고 옮겼습니다. 아주 착한 녀석들이고 훌륭한 짐꾼들이에요, 당나귀들은!"
▲ 포르투갈 전통벌통 코르크로 만든 옛날 재래식 벌통. 지금은 실제로 쓰지 않고 사무실 한 켠에 항상 자리하고 있다.
ⓒ Rita Horgan
다른 사진은 역시나 무척 앳된 모습의 프레데리쿠와 리타다. 말카타로 옮기기 전, 리스본의 작은 양봉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1970년대 사진답게 희미하고 예스러움이 가득하다.

사진 속의 프레데리쿠는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얼굴에 진지함이 가득하다. 아마 두 사람이 새로 정착하게 될 시골 마을과 앞으로 양봉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기대만큼이나 많은 걱정이 머리를 스쳤으리라.

처음 이곳에 정착했을 때는 현재의 창고 방 하나만 한 사무실에서 시작했다고 하니, 50년 양봉가이자 사업가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왔을지, 부침을 겪었을지 상상하는 내가 다 감개무량하다. 리타가 아주 곱게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직원들은 최고랍니다. 저는 직장(job)이 아니라 일(work)이 필요한 사람들을 세심하게 선택했어요. 저 역시 그러니깐요.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그게 눈에 보이면 합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그걸 요구해요. 지금까지 같이 있는 직원들은 다 그런 사람들이죠. 직장에 와서 그냥 앉아 있다가 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함께 일을 하는 사이죠."

프레데리쿠와 리타 모두, 얼굴이 해맑고 곱다.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일을 해 나가는 사람 특유의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로 50년 양봉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착실하게 성장해나가는 회사의 CEO로 여러 가지 바쁠 테지만 프레데리쿠는 아직도 매주 벌통들을 찾아 꼼꼼히 둘러본단다. 큰 아들 역시 함께 간다.

옛날 사진을 기꺼이 보여준 두 분에게, 나 역시 개인 앨범을 일부 공개했다. 한국에서 아이들과 함께 다녀왔던 꿀벌나라테마공원(칠곡군에서 운영)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무척 좋아하신다. 아이들의 눈높이로 꿀벌에 대해 재미나게 이해하고, 채밀 체험도 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때도 벌집틀에서 꿀을 떠 먹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아이들에게 벌과 생태계, 자연의 경이와 소중함을 접하게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에 우리 모두 공감했다. 아무쪼록 이런 공감대와 연대가 조금이라도 벌과, 벌을 가능케 하는 환경을 생각하는 노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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