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채식주의자' 미스터리…소설과 똑같은데 왜 실패했나

2024. 10. 2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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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진정, 기적 같은 일이다. 한편으로 볼 때 심대한 미스터리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관념의 강’을 건너야만 이해와 교감이 가능할 문학을, 그것도 물경 13년 전에 영화로 만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미스터리라 함은 작가 한강이 어떻게, 그리고 왜,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영화화 하는데 동의와 허락을 해줬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작가 한강이 노벨상을 타는데 주요했던 『소년이 온다』 역시 많은 제작자와 감독들이 탐을 냈으나 ‘소설로 태어났으니 소설로 남아 있게 해 주고 싶다’는 작가의 호소에 따라 영화화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런 사람 중에 톱 클래스 급 감독들도 포함된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는 비교적 단박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것도 저예산독립영화 방식이다. 이 계통의 오랜 투자배급사였던 스폰지이엔티(대표 조성규, 조은운)가 작품 개발에 앞장 선 것으로 보인다. 감독은 당시 장편 데뷔를 하지 않은 신예 임우성이 맡았다. 영화는 2011년 10월 13일에 개봉돼 종영 때까지 단 3500명의 관객을 모았다. 완성된 것은 2009년이었으며 그 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됐고 이듬해인 2010년에 미국의 유수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됐다. 영화제 라인업에 비하면 흥행 성적은 매우 초라한 상태였다. 배급사 스폰지이엔티가 당시 운영하던 광화문 조선일보 별관 빌딩 내의 스폰지 극장에서 거의 단관수준으로 개봉된 탓이 컸다. 당시만 해도 작가 한강의 이름을 대중들이 잘 들어 보지 못한 때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의 힘이 원작에 비해 많이 부쳤던 것이 사실이다.

재해석 포기했거나 게을리한 느낌

2010년 개봉한 영화 ‘채식주의자’의 한 장면. [중앙포토]

원작소설과 영화는 한 마디로 샴 쌍둥이와도 같은 것이다. 같지만 다른 구석이 있고 다른 구석이 있어야 같아지는 존재들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둘 다 살 거나 아니면 우성인 쪽이 살기 위해서는 열성인 쪽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영화는 일종의 서로 ‘죽어야 사는’ 관계이다. 영화 ‘채식주의자’가 올바로 살기(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원작을 ‘죽였어야’ 했다.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재구성 했어야 괜찮은 영화가 됐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두고 흔히들 원작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부른다. 그건 마치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곡의 위대함도 살리고 연주자의 뛰어남도 살리느냐가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화감독 임우성은 ‘채식주의자’를 만들 당시 지나치게 작품에 경도돼 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채식주의자’의 결정적인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소설 그대로,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똑같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쌍둥이 둘 다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중앙포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3부작 연작소설이다.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나무 불꽃’으로 돼있다. 임우성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영화는 제목을 ‘몽고반점’으로 했어야 솔직했을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소설은 3부인 ‘나무 불꽃’으로 옮겨 가면서 어려워진다. 정신분열에 시달리는 주인공 영혜의 심리를 언니인 인혜가 자신의 머리와 마음 속으로 옮겨 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부분을 마치 과감하게 점핑 컷 하고 가는 양 삭제하고 가지만, 소설은 여기가 핵심이다. 영화가 그랬던 건 아마도 연출의 판단보다는 투자와 제작 사이드에서 이 영화가 대중적 성공과 흥행을 가져가야 한다는 욕망을 투사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는 한 페이지 분량의 정사 신을 영화는 10분 가량 이어지는 두 차례의 섹스 신으로 바꿔 냈다. 주연 영혜를 맡은 여배우 채민서는 나름 내면 연기에 주력했지만 ‘벗는 이미지’로 소모됐다. 이 모든 것이 영화가 작품에 대한 재해석을 포기했거나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노벨상을 타는 문학은 그 관념의 깊이가 남다른 작품들이다. 영화제에서 상을 타는 영화들이 태반이 예술영화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노벨상 수상작들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들어지더라도 원작만큼 대중적 주목을 받지 못한다. 지난 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욘 포세 원작의 영화 ‘밤의 노래’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2022년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의 원작 『레벤느망』의 동명 영화는 같은 해 국내에도 수입돼 상영됐으나 관객 7500명을 모으는데 그쳤다. 노벨문학상과 영화는 친하지 않다. 친해지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노벨문학이 쉬워지거나 영화가 좀 더 문학적으로 해박해져야 한다. 예술영화가 관객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예술영화가 좀더 대중적 화술을 구사하거나 아니면 대중이 매우 지식인스러워져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루키 소설 영화화 가능성 아주 작아

사라 워터스의 소설을 원작으로한 영화 ‘아가씨’. [사진 각배급사]

일본의 작가 중에는 두 명의 무라카미가 있다. 한 명은 늘 노벨 문학상이 거론되고 한 명은 종종 스캔들에 휩싸이며 살아가지만 유명세만큼은 뒤지지 않고 산다. 한 명은 무라카미 하루키이고 한명은 무라카미 류이다. 무라카미 류의 작품들은 줄곧 영화로 만들어진다. 감독도 작가 자신이 직접 맡을 때가 많다. 『69』가 그랬고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등이 그랬다. 반면 하루키의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엄두를 내지 못한다. 예컨대 『기사단장 죽이기』의 2권 362페이지에서 440페이지까지, 물경 80쪽 가까이 이르는 분량에서 주인공은 이른바 ‘메타포 통로’를 통과한다. 이 장엄한 관념의 골짜기를 주인공이 건너는 과정을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치 유체이탈 화법으로 써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쓰고 있는데 또 다른 내가 쓰고 있는 나를 내려다 보는 것 같은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탄생한 ‘글의 물줄기, 그 폭포수’는 도통 영화로 만들 수 없다.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당연히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루키의 『1Q84』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아오마메가 고속도로 광고판 뒤 비상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기 전 택시 기사와 나누는 대화는 (상업)영화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다. (상업)영화 속 인물들은 대체로 그런 현명하고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하루키의 소설은 그가 이후 노벨상을 탄다 해도 영화로 만들어질 공산은 작다. 아주 작다. 게다가 하루키의 소설은 관념적이면서 방대한 서사를 지닌다. 2시간 안에 담을 수가 없다. 그건 유태인 출신 뉴요커 작가 폴 오스터의 숱한 소설들도 그렇다. 그의 『거대한 괴물』 『달의 궁전』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예 작품 자체를 손봐야 한다. 멕시코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대표작 『백년동안의 고독』이 영화로 만들어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영화 ‘레벤느망’의 한 장면.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의 소설이 원작이다. [사진 각배급사]

문학적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들은 원래 영화로 만들지 않는다. 애당초 만들어질 수가 없다. 영화로 만드는 소설은 대체로 장르문학권에 있는 것들이다. 무라카미 류나 미아베 미유키, 히가이시 게이고 같은 일본의 인기 장르작가들의 작품들, 미국의 엘모어 레너드나 토마스 해리스, 데니스 루헤인 혹은 마이클 코넬리의 것들이다. 영화는 문학과 예술에서 자아를 찾기 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자기만의 스타일로 문학이나 예술을 하고 싶어 한다.

노벨상급의 문학을 영화로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감독은 바로 한국의 박찬욱이다. 그는 쿠팡플레이에 올라 있는 7부작 드라마 ‘동조자’로 천부적 영화인이자 문학인임을 증명해 냈다. 비엣 타인 응위엔의 동명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작품을 박찬욱은 자기 식으로 완전히 해체하고 재해석해 냈다. 문학의 재창조이자 재탄생이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첩보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6부작 드라마로 만든 ‘리틀 드러머 걸’로도 박찬욱은 작품 분석의 예리함이 최고 수준임을 보여줬다. 사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를 ‘아가씨’란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동성애 코드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을 채택했다. LA비평가협회는 그런 그에게 외국어영화상 트로피를 안겨줬다.

문학의 역사는 2000년에 이르지만 영화는 갓 100년을 넘겼다. 문학적 상상력과 관념의 그 지고지순함을 영화는 ‘절대’ 따라 갈 수가 없다. 노벨문학상이 지닌 뛰어난 문학적 가치, 그 독보성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숭상하고 따라 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문학이 지향하는 인류애적 가치를 영화 역시 흠모하고 따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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