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가 이렇게 쉽게 읽힐 줄이야

박은선 2024. 10. 26. 15: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평] <김원익의 그리스 신화> 신화에서 인간을 본다

[박은선 기자]

그리스 신화에는 정말 많은 신들이 등장합니다. 책을 따라가려면 주석을 보면서 거의 독해하듯 읽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아 포기하기 일쑤입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독자들이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덥썩 집어 들었다가 독서 여정을 완주하는데 실패하지요.

그런 면에서 <김원익의 그리스 신화>는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다가옵니다. 그리스 신화를 이해하기 쉽게 잘 요약해주고 있어서 그리스 신화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김원익 박사의 안내에 따라 그리스 신화를 따라가다보면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도 완주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것 같습니다.

20여 년 넘게 신화에 푹 빠져 살아온 저자는 그동안 그리스 신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한 책은 쓰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공부의 내공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는데, 그 때가 온 것이겠지요. 김원익 작가는 '신화는 결국 우리 인간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그동안 써온 책들을 기반으로 그리스 신화를 태초부터 로마의 건국 신화까지 총정리했습니다.

제가 읽어본 소감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게 쉽게 읽히는 벽돌책은 드물다"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관한 것이라면 아주 세세한 것까지 모두 담아낸 '그리스 신화 사전'같은 친절한 책이지요. 목차를 찾아보면 어지간한 궁금증은 금방 해결해줍니다.

신화 속 이야기를 자신과 연결해봐야 하는 이유
▲ 김원익의 그리스 신화 책 표지
ⓒ 세창출판사
CJB청주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 2024 리딩코리아 >에서 이권우 도서평론가는 김원익 박사가 그리스 신화를 역사와 관련지으려 하지 않는 태도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 신화를 이야기 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결부시켜 설명하고자 애쓰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지요. 김원익 박사는 독자들에게, 신화는 결국 우리 인간의 이야기인 만큼 신화 속 이야기를 자기 자신에게 연결시켜보라고 권합니다.

제우스를 비롯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심리유형으로 설명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신들의 왕 제우스를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지요. 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까지 권력을 유지하려고 무리수를 두다 실패한 점을 잊지 않고 어떻게든 성공한 아버지가 되는 게 목표였다고 분석합니다. 가화만사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캐릭터로 나오는데요. 그러면서도 올림포스 신들을 잘 통제했으며 까다로운 헤라까지도 슬기롭게 관리합니다. 가정과 기업, 국가까지 모두 잘 다스린 성공한 리더의 모습을 제우스에 투영하고 있지요. 그리스 신화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바라보게 해주는 책입니다.

'제1회 김종철 시학상'을 받은 박혜진 문학평론가는 "문학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의 근원적 욕망을 따라가보면 원형적인 인물이 있다, 그건 대체로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글을 쓰다가 인물에 대해 파고들게 될 때면 신화를 찾아본다는군요. 신화와 문학작품 사이의 간극에 그리스 신화를 읽는 핵심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알고 보니 박혜진 평론가도 어릴 때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야 될 것 같아서 늘 손에는 쥐고 있었는데 항상 실패했다고 하는군요. 결국 그리스 신화 앞에서는 유명한 문학평론가든 일반 독자든 누구나 똑같이 어렵게 느끼는구나 싶었습니다.

박혜진 평론가의 경우 "일단 이름이 너무 어려워 다 잊어버리고, 두 번째는 이게 더 본질적인 이유 같은데 족보가 너무 꼬여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읽으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문학작품을 읽고 비평을 쓰면서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어둠과 욕망, 폭력성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그리스 신화의 신들의 족보가 꼬인 것처럼 복잡하게 꼬여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작품 속 인물들을 단순히 선악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고, 인간이 운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혼돈으로 여겨 거리를 두고 파악하게 되었답니다.

인물이 보여준 원형의 의미를 찾아가면서 신화가 다르게 읽혔고 재미있게 보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구에게나 각각 신화를 만나게 되는 때가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인간과 문학작품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 그 관심의 정체와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신화를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신화에서 인간을 본다는 김원익 작가의 의도를 꿰뚫어보는 평론가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인간 내면의 메커니즘을 들여다보고 있는 정재승 교수는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를 빗대어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개별 현상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서, <김원익의 그리스 신화>는 관계를 중요하게 바라보는 책이며 '사회 관계 안에서 사람의 욕망이 어떻게 발현되는가' 하는 관점이 돋보였으며 결국 현대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있어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고 평했습니다.

< 2024 리딩코리아 >에서 선정한 <김원익의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부담스러워하는 독자들에게 선물처럼 다가옵니다. 도대체 신들이 왜 전쟁을 벌였단 말인가, 티탄 신족과 올림포스 신족은 왜 싸우고, 제우스는 어떻게 해서 신들의 왕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는지 등을 무엇이든 물어보면 답을 해줍니다. 그리스 신화의 맥락을 짚어낼 수 있을만큼 익숙해질 때, 꼬일대로 꼬인 신들의 족보와 셀 수 없이 등장하는 신들의 이름의 홍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지요. 바로 그때 신화는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장미의 이름> <그리스인 조르바> 등을 번역하셨던 이윤기 선생님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화는 미궁이다. 어떻게 신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빠져나올 것인가?' 질문을 던집니다. 미궁 이야기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미노스왕과 미노타우로스가 떠오르고, 영웅 테세우스가 생각나지요.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르고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는 열쇠를 선사한 아리아드네가 나옵니다. 이윤기 선생님은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들고 미로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이 책에 담긴 12가지 열쇠로 상상력의 빗장을 풀어 신화라는 미궁의 진입과 탈출을 시도해보자'고 권합니다. 테세우스가 손에 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다면, 독자에겐 상상력이라는 실타래가 있지요. 테세우스의 아리아드네가 아닌 '나'의 아리아드네를 만나기를 권하셨습니다.

철학자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그리스 신화의 상징을 전하는 김헌 교수는 <신화의 숲>에서 '신화는 우리가 삶에서 바라는 것, 두려워하는 것,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상징적 이미지, 즉 신들이나 신적인 존재들로 그려내어 이야기하는 것'이라며,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말을 빌려 "신화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신들의 이야기는 그대로 우리 삶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인데요. 신화 속에서 만나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실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신화에서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는 트로이목마처럼 작용한다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표지
ⓒ 웅진지식하우스
▲ 신화의숲 책표지
ⓒ 포레스트북스
자미라 엘 우아실과 프리데만 카릭은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에서 '이야기는 트로이 목마처럼 작동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뇌는 트로이고 이야기에 숨겨진 정보는 그리스 병사라는 겁니다. 성 밖에 버려진 목마가 더 인상적이거나 아름다울수록 우리는 목마를 우리 도시 안으로 더 기꺼이 들이고 싶어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리스 신화가 우리에게 발산하는 매력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때 우리는 경기를 뛰는 선수와 하나가 되어 응원합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펼치는 월드컵 축구경기를 관람할 때, 혹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타이거즈와 라이온스의 각축전을 볼 때, 둘 중 어느 한 팀을 선택하지요. 만일 어느 팀도 택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습니다. 어느 한 팀을 택하면 그 팀의 패배를 걱정하거나 승리를 응원할 수 있고 우리가 그 팀과 동일화하는 순간부터 우리팀이 패배하면 내가 패배하는 것이 됩니다.

파리스가 황금사과의 주인을 정해주면서 격랑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에서도 여러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군을 대표하는 결투에서 도망가는 비겁한 모습에 화가나지요. 그런데 천하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발목을 화살로 명중시켜 영웅을 절멸시키는 대목에서는 책장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입니다. 응원하고 미워하고 함께 달리면서 그리스 신화를 완주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파리스의 우쭐거리는 모습과 결투에서 죽기 직전 비겁하게 도망치는 모습에서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야기의 힘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책 표지
ⓒ 원더박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지혁명 이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믿을 수 능력, 즉 '허구'를 믿게 된 사피엔스가 신화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그 허구를 믿게 된 이후 세상은 달라졌다는데요. 공동의 상상인 허구를 믿게 된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공동의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은 이카루스의 허무를 위로하는 로켓을 우주로 발사하기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그리스 신화의 긴 여정을 행복하게 마무리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흥미진진하게 자극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에서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테세우스의 목숨줄인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나'의 실타래로 삼아 상상의 여정을 떠나는 겁니다.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오면서 다른 이야기들과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이야기의 원형을 만나고, 고대인의 이야기에서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새로 만나보는 겁니다. 거대한 장벽 같아 넘고싶은 마음조차 지운 채 지냈던 그리스 신화가 이제는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 같은데요. 옹기종기 서로의 몸을 부대며 웅크리고 있는 샛노란 병아리 한 마리를 손을 뻗어 가만 감싸 들어올리는 것 같이 소중한 마음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송고 후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