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아버지의 발목을 꽁꽁 묶어둔 그림 한 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문하연 기자]
부친은 올해 82세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부친과 일 년에 한두 번 여행을 떠난다.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는 부친이 이나마 걸을 수 있을 때 함께 다니며 좋은 추억을 쌓고 싶기 때문이다.
지난 봄엔 언니까지 출동해서 군산 일대를 돌았고, 이번엔 부친과 단 둘이 부여, 논산, 강경 일대를 1박2일 돌아볼 예정이다. 여행지는 부친이 선택하고, 그에 따라 동선을 짜고 맛집과 숙소를 예약하는 건 내 몫이다.
부친과 나는 삼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거주하는 관계로 논산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부친께 논산행 기차표를 예매해 보내드렸다.
극 F 성향의 아버지
날이 좋은 10월엔 지방 어느 도시를 가도 축제다. 논산은 대추 축제, 강경은 젓갈 축제, 부여는 백제 문화제. 그러니 볼 것과 먹거리가 많다. 부친은 감정도 풍부하고 친화력도 좋은 극 F이시다. 어느 날 부친에게 문자가 왔다.
"막내딸, 여긴 비가 하염없이 와. 비가 하염없이 오니까 마음이 울적하네. 회신 요망."
회신 요망만 없었으면 울적한 팔십 노인네가 가여워서 울 뻔했는데, 회신 요망이란 요망한 단어 때문에 눈물은 쏙 들어갔다. 부친께 바로 전화를 걸었다. 부친은 웬일이냐고 전화를 받으신다. 분명 회신 요망이라 해서 회신한 건데, 웬일이냐니.
괜히 민망해서 그러시는 건지 알기에 "어쩌자고 비가 그렇게 하염없이 올까요. 적당히 오고 말 것이지." 맞장구 쳐주면 "웬만치 오고 말제 계속 와 분다"며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글로 쓸 땐 표준어인데, 말씀으로 하시면 사투리다. 그럴 땐 얼른 화제를 돌려 요새 사과가 맛있네, 하며 제일 좋은 걸로 사드시라고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그 자리에서 계좌이체를 한다.
즉각적인 금융 치료를 받으신 부친은 고열에 해열제를 맞은 사람처럼 금세 말짱해져서 "어허, 이러라고 말한거슨 아닌디"라며 좋아하신다. 단지 돈보단 부친의 울적한 마음을 알아준 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여러 차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따뜻한 마음만으론 이토록 빠른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고백하자면, 부친과 여행할 때 부친의 지나친 친화력과 TMI 때문에 일행이 아닌 척 조금 떨어져 앉을 때도 있었다. 관광지를 산책하다가 잠시 벤치에 앉으면 옆 벤치에 앉은 사람에게 꼭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다. 다시 볼 것도 아닌데, 어디서 왔는지 왜 묻는지를 이 불효녀는 당최 알 수가 없다.
또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어딜 가도 꼭 문화재 해설을 찾아 들으시는데, 문화재 해설사가 만약 이 건물이 1942년에 지어졌다고 말하면, 부친은 난 1943년 생인데, 그럼 나보다 이 건물이 나이가 많네! 하며 감탄하는 식이다. 부친이 BTS도 아니고 몇 년에 태어났는지 아무도 관심 없는데, 많은 사람 앞에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 불효녀는 또 알 길이 없다.
이 불효녀가 아는 건 단 하나, 그런 말을 못 하게 하면 부친은 "왜 넌 말도 못 하게 통제하냐?"라며 삐진다는 거다. 그러니 입을 다물고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 사비도성 가상체험관 부소산성 입구에 있다. |
ⓒ 문하연 |
백제 역사 체험관이었다. VR 고글을 쓰고 있으면 경비행기에 탑승해 백제 문화유산이 있는 곳곳으로 날아갔다. 부친은 처음 해보는 VR 체험을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고글을 쓰고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에서는 진짜 떨어지는 사람처럼 손잡이를 꼭 쥐고 무서워하시더니 체험이 끝나고 고글을 벗자 멋쩍으셨는지 한참을 웃으셨다.
부소산성 안에 있는 낙화암과 고란사를 둘러보려면 1.5킬로 정도 산길을 걸어야 하는데, 무릎이 불편한 부친이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됐다. 가는 데까지 가보고 정 힘들면 다시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체험관을 나왔다.
체험관 옆엔 나란히 부소갤러리가 있는데, 수채화 동호회의 그림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명화도 아니고, 유명 작가의 전시도 아니라 지나치려 했다. 미술관에 서 있으면 무릎이 아플 테고, 부친의 체력을 아껴야 목적지까지 최대한 갈 수 있으니까.
▲ 부소갤러리 사비도성 가상체험관과 나란히 붙어있다. |
ⓒ 문하연 |
"아빤, 이 그림이 좋아요?" 내가 물었다. 부친은 "응. 좋아.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엔 다들 이렇게 가난하게 살았거든." 나는 한 걸음 뒤에서 부친의 그림 감상이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관계자 두 분이 내 곁으로 왔다.
난 두 분께 우리 아버지가 저 그림을 가장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한 분이 왜 그 그림이 좋은지 내게 물었고, 그 순간 난 구부정한 어깨의 부친이 두 손을 모으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쓸쓸하기 짝이 없는 그림을 지긋이 바라보는 걸 발견하고 말았다. 느닷없이 목이 멨다. 내 목 상태를 알 리 없는 부친이 나 대신 답했다.
"이 그림은 정말로 쓸쓸하기 짝이 없네요. 그런데도 이 그림이 참 좋아요."
감동에 젖은 목소리였다. 과거 내가 알지 못하는 쓸쓸한 일이, 가난해서 겪었을 가슴 아픈 일이 그의 내면에 고여있다고 생각하니 계속 목이 멨다. 생각해 보면 난 그가 그림 같은 건 잘 알지도 못하고, 좋아할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니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도 미술관에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로 말하자면 어쭙잖은 지식으로 미술관 책도 썼고, 대단찮은 언변으로 미술 강연도 다니면서 말이다. 명화만 그림이 아니란 걸 말로는 잘도 떠들면서 아마추어 작가의 그림은 보지도 않고 별것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니.
어떤 감동은 추억과 맞닿아 있다
<흑백요리사>에서 심사를 맡았던 안성재 셰프가 어떤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생 요리를 만들라면 무엇을 만들겠냐는 질문을 받고, 어린 시절 할머니가 만들어줬던 감자떡이나 냉면을 만들 것 같다고 했다.
그가 흑백요리사에서 급식대가의 음식을 먹으며 감동에 젖는 장면과 연결되는 대답이라 느껴졌다. 나의 부친도, 안성재 셰프도 그렇듯이 어떤 감동은 추억과 맞닿아있다. 그러니 감동을 주는 그림이 꼭 명화일 리 없는 것이다.
우연히 들렀지만, 다시 돌아본 부소갤러리는 아름다운 건물 자체를 보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고, 넓은 잔디도 있어 인생샷을 찍기도 좋았다. 그 뒤로는 두어 시간 숲속을 산책하기 좋은 부소산성이 있으며, 고란사 아래에서 배를 타고 백마강을 둘러볼 수도 있으니, 요즘처럼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날, 당일치기로 훌쩍 다녀와도 좋은 장소였다.
날씨까지 좋아서 이번 여행은 또 우리에게 행복한 추억을 남겼다. 아마 훗날, 딸과 아빠가 여행하는 그림을 본다면 난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감동이 오래가면 경찰에 잡혀가는 법이라도 있는지, 다음 날 부친은 뜬금없는 문자를 보냈다.
"노벨문학상 받은 한강이 너랑 동갑이더라. 누군 그런 상도 받는데 우리 딸은 되는 것 하나 없어 아버지가 심히 언짢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비교할 사람하고 비교해야지 감히 한강 님과 비교하시다니. 되는 것 하나 없다는 말은 작년 드라마 공모전에 당선되고도 더 진전이 없었으며, 올해 새롭게 준비한 드라마가 공모전 최종심에 오르고도, 수상하지 못한 것을 뜻했다.
그런 팩폭을 하시는 부친께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 안 된 나도 속상하지만, 안 되는 자식을 보는 부모도 속이 상하시겠지' 싶어 신속히 답장을 보냈다.
"언젠가는 될 거예요, 아버지. 왜냐면 제가 될 때까지 할 거니까요. 회신 요망!"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건희는 주식 잘 모른다'는 검찰, 김 여사 인터뷰는 그 반대
- '그날' 이후 돌변한 미군의 폭격... 이렇게 잔인해도 되는 걸까
- 병원·약국 없는 동네에서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
- 이태원 2주기, 세은 아빠의 다짐 "이름 없는 조의금, 사회에 돌려드릴 것"
- 버려진 땅 1만 5천 평에 코스모스를 심었더니
- 따뜻한 '엄마' 김수미에게 바치는 한마디... "감사합니다"
- 북한, 러시아 파병 사실상 시인… "국제규범 부합하는 행동"
- 이스라엘, 이란 군사 시설 보복 공격...중동 갈등 중대 기로
- '노동자가 곧 예수'라는 믿음
- 침묵 깬 '국민거포' 박병호, 이승엽 넘어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