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책이 청소년유해도서?…'나쁜책' 검열에 시달리는 도서관

이영근 2024. 10. 2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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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 채식주의자』를 두고 전국학부모단체연합이 선정성을 이유로 "초중고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 비치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박종근 기자


전국학부모단체연합(전학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 대해 선정성을 이유로 “전국 초·중·고 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 비치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도서관계는 “일부 단체와 시민의 도서 검열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전학연은 22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형부와 처제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내용을 언급하며 “누가 봐도 청소년유해매체물인 내용의 책을 노벨상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직 미성년인 초·중·고등학생들에게 권장하는 것이 말이 되는지 묻고 싶다”고 주장했다. 전학연은 『채식주의자』의 ‘아동 및 청소년 서가 비치 반대 서명’에 195개 단체, 1만474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도서관계에서 이런 압력 행사는 비일비재하다. 김신영 대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가 지난 6월 발표한 논문
「도서관 지적 자유 침해 양상과 대처 방안」

에 따르면, 전국 426개 도서관 가운데 85.2%의 도서관에서 공문, 성명서, 전화 및 방문 등 방법으로 민원이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성평등, 젠더, 과거사, 특정 정치인 등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도서가 주요 타깃이 됐다. 지난 6월 광진정보도서관엔 『소년이 된다는 것』이 청소년 유해매체물이니 폐기해달라는 민원이 수차례 제기됐다. 『소년이 된다는 것』은 10대 청소년에게 솔직하고 현실적인 성교육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책이다. 논의 끝에 폐기는 하지 않았지만 민원은 한동안 계속됐다고 한다. 지난 8월 성북구의 한 도서관에는 『친일인명사전』을 서가에 꽂지 말라는 민원도 수시로 들어왔다고 한다.

강경숙 조국혁신당 의원이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열린 서울특별시교육청·인천광역시교육청·경기도교육청 국정감사에서 임태희 경기도교육감을 향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들고 도서 검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뉴스1


거듭된 민원에 사서들은 지쳐간다. 임선경 자양한강도서관 사서는 “도서를 구입할 때 어떤 민원이 발생할지 나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며 “도서관은 시민들이 다양한 책을 읽고 가치 판단을 하는 역량을 키우는 공간인데 엇나가는 것 같아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말했다.

배경재 동덕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절차와 기준을 갖춰 사서가 수서(收書)한 도서는 폐기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도 넘은 민원은 사서의 전문성과 도서관의 지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한국도서관협회는 지난 8월 ‘지적 자유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김주영 성북문화재단 도서관사업부장은 “알고리즘 등 기술 발전으로 획득하는 정보의 성격이 획일화된 부작용이 있다”며 “적어도 도서관은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다수 공공도서관은 시민이 참여하는 운영위원회를 두고 논란에 대처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고소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다. 2019년 8월 파주시 중앙도서관은 논란이 컸던 『반일 종족주의』 에 대해 운영위 토론을 거쳐 도서관에 비치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반대 의견을 고려해 표지에 ‘본 도서의 역사적 관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책입니다. 다음의 책도 참고하셔서 보시길 권해드립니다’라는 스티커를 부착하고 다른 관점의 책을 함께 소개했다. 이에 지난 2021년 저자인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등 5명은 도서관 직원 3명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교장 등은 “스티커를 부착해 낙인을 찍어 출판의 자유 등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17일 서울도서관 외벽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한강 작가님 덕분에 책 읽는 시민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라고 적힌 대형 글판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박지원 판사는 이 교장 등의 청구를 기각했다. “표지 문구가 저작자들인 원고들을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원고들은 공론의 장에 나선 베스트셀러의 저작자들로서 공적 인물에 해당하므로 비판을 감수해야 할 지위에 있다”는 이유에서다. 윤명희 전 파주시 중앙도서관장은 “논쟁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잡아보려고 시민 참여를 통해 적극적으로 대처한 것인데 소송까지 당해 직원들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나쁜 책’ 논란은 있다. 주로 성소수자나 소수인종을 주제로 한 도서가 학부모 단체로부터 금서 지정 요구를 받는다. 하지만 도서관의 지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도 적지 않다. 일리노이주는 지난해 6월 ‘도서검열 금지법’을 제정했다. 법은 공공도서관이 주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해선 “당파적 입장, 이념, 창작자의 출신과 배경 때문에 책을 금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명문화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미국도서관협회(ALA)는 매년 도전받는 책(Challenged Books) TOP 10 목록을 발표하고 보고서를 만든다.

배경재 교수는 “불편한 책을 섣불리 폐기하기보단 이 책이 우리를 왜 불편하게 했는지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논의의 장을 조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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