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동맹사건, 6년 옥살이

김삼웅 2024. 10. 25.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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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 10] 유림과 그의 동지들은 예심을 촉구하는 옥중 단식을 결행했다

[김삼웅 기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 박금옥
봉천으로 돌아온 유림은 1931년 봉천시 신촌에 의성숙(義誠塾)이라는, 중국대학교 입학을 위한 대학예과에 준하는 초급대학 수준의 학교를 세웠다. 한인2세들의 교육과, 특히 1929년 11월 3일 식민지배와 노예교육에 반대하는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여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많은 학생들이 퇴교 처분과 검거 위협에 놓이면서, 이를 피해 만주로 피신해왔다.

의성숙은 이들의 은신처이고 재교육의 역할을 맡았다.

이 학교는 1929년 11월 초순 무렵부터 광주에서 항일학생운동이 돌발하여 전국적인 반일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광주고보는 물론 경향 각처의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이 퇴교처분을 당해서 교문을 떠나게 되어 배움의 길을 잃게 된 애국 청소년 학생들을 모집하여 중국으로 망명해 오게 하고 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계속하도록 하려는 배려에서 세워진 것이다.

의성숙은 보습교육을 겸한 학교로 중국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끔 정규 학과를 가르치는 것을 표방하였다. 고보 과정을 중퇴한 한국학생으로 중국의 대학에 진학하려면 영어·수학·중국어 기타의 실력이 모자랐으므로 이를 보충하자는 것이 표면적인 설립 취지요 운영 방침이었지만, 실제의 교육은 이러한 정규 학과목을 교육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독립사상과 민족정신의 고취와 확립을 위해 한국역사 특과교육을 실시해 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로서는 아버님의 뜻에 따른 의성숙의 떳떳한 의식 고취와 정신함양 교육을 통하여 의기가 충천해갈 수 있었다. (주석 1)

이 무렵 국내에서는 1929년 11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흑색사회주의자대회가 무산되었음에도 각지에서 아나키즘 단체가 은밀히 조직되어 활동을 개시했다. 유림은 이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은밀히 접촉하였다.

유림이 만주 봉천에서 고투를 무릅쓰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는 31년 봄 무렵부터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동맹에 대한 일제 검거 신풍이 불었다. 아나키즘 계열의 원산청년회의 관제 노조인 함남노종회 사이에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지자, 이를 수사하는 파정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동맹의 조직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31년 4월 1일 최갑룡(관서흑우회 소속), 조중복(단천흑우회)이 원산경찰서 형사에 의해 체포돼 원산으로 압송되었고, 이홍근(관서흑우회), 강창기(단천흑우회), 안봉연(만주흑우회), 이순창(동) 등 모두 8명이 잇달아 체포되었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동맹의 핵심인물인 유림은 무사할 수 없었다.

한창 의성숙으로 고전하던 그가 봉천 자택에서 체포된 시점은 31년 10월 7일, 원산으로 압송돼 형식적인 신문을 받고는 곧 바로 구속되고 말았다. (주석 2)

일제는 유림과 그 동지들에게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를 씌웠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한 악법주의 악법이었다. 그는 원산 와우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1년 10월 26일 원산검사국에 송치되는 과정에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같은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최갑룡의 증언이다.

유치장에서 일곱 달이나 묵고 있는 동안 별별 흥밋거리도 많았다. 특히 사상범으로 함흥·안변에서 농민동맹원이 잡혀왔다. 많은 사상범 가운데에는 여성동무도 끼어서 남녀 혼숙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변기통이 감방 안에 있어서 대소변을 볼 때면 얼굴을 가리고 여자의 경우 치마로 커텐을 쳐야하는 임기응변의 편법을 써야 했다.

유치장이란 여러 가지 잡범이 드나드는 곳이다. 고문이란 원시적이어서 둥근 걸상에 허리를 걸치게 하고 주전자의 물을 코에 붙는 식이었다. 숨이 막혀서 고문관의 넥타이를 잡았다가 매를 심하게 맞은 적이 있다. (주석3)

유림 등에 대한 검사의 기소장에서 사건의 윤곽을 살피게 한다.

피고인 이홍근·최갑용은 29년 10월 29일 오후 2시경 피고인 조종복·임중학 및 당시 만주로부터 평양에 도착하여 있던 피고인 유화영(유림)과 함께 평양 기림리 소재 소나무 숲에서 화합을 가졌다. 이상 5명과 함께 공모를 한 무정부주의 사회건설의 목적으로 결사조직과 아울러 각 강령 규약 기초 등에 관하여 종종 협의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29년 11월 1일 오전 11시경 다시 이상 소나무 숲 속에서 피고 5명이 회합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1)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하고 코뮨을 기초로 그 자유연합에 의한 사회조직으로 변혁할 것.

(2) 현재의 사유재산 제도는 철폐하고 지방분산적 산업조직으로 개혁할 것.

(3) 현재의 계급적 민족적 차별은 철폐하고 전인류의 자유 평등 우애의 사회건설에 기한다. (주석 4)

일제의 악행 중에는 독립운동가들을 구속 상태에서 오랫동안 방치한 것이다. 좌우간 재판을 열어 유무죄를 가리지 않고 미결상태를 유지한 것이다. 이 사건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17개월 동안이나 예심을 열지 않았다.

유림과 그의 동지들은 예심을 촉구하는 옥중 단식을 결행했다. 그 결과 함흥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과정도 지지부진했다. 1933년 12월 17일 공판이 열리고, 일주일 뒤 형이 선고되었다. 이홍근 6년, 유림과 최갑용·조중복·임중학 각 5년이지만 왜경에 검거된 1931년 10월부터 치면 만 6년의 옥고를 치룬 것이다.

주석
1> 유원식, 앞의 책, 33~34쪽.
2> 김재명, 앞의 책.
3> 최갑용, 앞의 책, 35~36쪽.
4> <독립운동사자료집(11)>, <의열투쟁사>, 816~81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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