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극단적 부는 부정한 돈…개인의 부를 제한하자는 도발적 상상

박병희 2024. 10. 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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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잔재 남아있는 獨 기업…노예교역 통해 부 축적한 美
부도덕한 富 불평등 심화시켜…"개인의 부 상한두자" 제안
상속은 피상속인에 불로소득…소득 있는곳에 과세는 당연

"누군가가 자신의 부를 진정으로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만 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의 제한선’ 6장에 등장하는 도발적인 질문이다. 행간의 의미는 노력과 능력으로만 돈을 번 부자는 없다는 주장으로 보인다. 얼핏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편협한 주장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최근 늘어가는 우리 사회의 묻지마 흉악 범죄를 생각하면 오늘날 부가 창출되는 방식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늘고 있음도 분명해 보인다.

‘부의 제한선’을 쓴 잉그리드 로베인스는 네덜란드 위더레흐트대학교 윤리연구소의 제도윤리학 분과장을 맡고 있는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그는 오늘날 불평등을 점점 심화시키고 있는 부는 매우 비도덕적이고 때로는 불법적인 속성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부가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천만장자, 억만장자가 될 자격은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부의 제한주의(Limitarianism)’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부에 상한을 두자는 것이다.

로베인스는 비도덕적인 돈의 사례로 나치 시기 악행과 연관된 독일 기업들부터 조세피난처를 활용해 세금을 회피하는 오늘날 다국적 기업들까지 다양한 사례를 언급한다. 오늘날 독일의 몇몇 억만장자는 세계대전 당시 선조들의 행위에 사회의 관심이 쏠리지 않기를 바란다. 전 소유주들이 나치의 반인륜 범죄가 자행되는 과정에서 수익을 챙겼기 때문이다. BMW, 포르셰 등이 그렇다.

미국의 부도 흑인들의 비중이 낮다는 점에서 비도덕적이다. 근본적으로 대서양 횡단 노예 교역을 통해 축적된 부이기 때문이다. 로베인스는 과거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노동에 대해 받지 못한 상실 임금의 현재 가치가 20조3000억달러에 달한다며 정당한 보상을 받았다면 오늘날 미국 흑인의 부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 주장한다.

부도덕하게 쌓은 부의 또 다른 예로는 도둑정치가와 부패 공직자를 들 수 있다. 도둑정치가는 부를 늘리고자 정치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을 잡은 뒤에는 권력을 유지하는데 부를 사용하는 이들을 뜻한다. 여러 개발도상국의 독재자들에게서 그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유럽에서는 블리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 등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많은 다국적 기업들은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수익을 이전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세금을 회피해 납부를 최소화하도록 도와주는 재산 방어 산업(wealth defense industry) 시장도 커지고 있다. 이렇게 확보한 기업의 부는 합법적일 수는 있지만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로베인스는 부의 제한주의를 주장하는 철학적 근거도 제시한다. 부를 창출하는 시장은 사회적 제도라는 주장이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자연 상태의 이기적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게 되며 이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사회 계약에 의한 정부가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시장도 정부에 의해 구성되고, 보호되고, 작동되는 사회적 제도다. 시장에서 이해관계를 보호해주는 정부가 없다면 시장도 홉스가 주장한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적 제도인 시장에서 창출되는 부도 개인의 극단적 이익 추구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을 제한할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로베인스의 주장에 반박하며 오늘날 많은 부자들이 자선 사업을 통해 사회 환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로베인스는 자선은 해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부가 효과적인 빈곤 퇴치 정책을 취할 수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부자들의 자선 활동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즉 로베인스는 차라리 세금을 걷어 큰 정부를 지향하는 것이 더 옳다고 주장한다.

‘뜨거운 감자’ 상속세와 관련해서는 마땅한 세금이라 주장한다. 로베인스는 상속이 향후 불평등 심화의 큰 원인이 될 것이라며 대규모 상속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상속세 이중 과세 논란과 관련해서는 피상속인 입장에서 상속은 소득이며 그것도 불로소득, 소득 있는 곳에 과세는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류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로베인스는 정치 권력의 상속을 철폐한 인류가 경제 권력의 상속을 철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고 불평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책은 무수히 출간되고 있다. ‘부의 제한선’은 그러한 여러 책들 중에서도 꽤 급진적인 주장을 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단화하면서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한편으로 지나치게 급진적이기에 현실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한 오늘날 사회에서 그의 주장이 실현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도 생긴다.

로베인스도 부의 제한주의를 규제적 이상으로 제안한다.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의 제한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과정임을 인정하며, 도달하고자 노력을 경주하는 지향점으로 삼자고 권한다. 로베인스는 10년간 극단적인 부를 연구한 결과 어느 누구도 슈퍼 부자가 아닌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궁극적으로 윤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미국 의사 조너스 소크의 사례처럼 말이다. 소크는 1955년에 최초로 소아마비 백신을 발명해 미국에서 소아마비가 사실상 종식되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소아마비 백신 특허로 이득을 보지 않았다. 특허를 누가 소유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소크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이겠지요.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 특허를 낼 수 있습니까?"

부의 제한선 | 잉그리드 로베인스 | 김승진 옮김 | 세종 | 416쪽 | 2만20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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