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안의 시시각각] 악용당하는 헌법

강주안 2024. 10. 25.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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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안 논설위원

헌법의 수난사에서 “그놈의 헌법”을 빼놓을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6월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던진 이 말은 큰 충격으로 남았다.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공약을 비판하려다 "그놈의 헌법이 토론을 못하게 돼 있으니까"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로 시작하는 취임 선서를 했던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헌법과 헌법재판소를 힘들게 했다.
요즘 헌재가 그 시절 못지않은 시련을 겪는다. 이종석 소장과 이영진·김기영 재판관 등 국회 추천 세 명이 6년 임기를 마치고 지난 17일 퇴임했지만, 국회는 후임자를 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헌재가 정상 운영되지 못한다. 국회와 대통령·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추천한 재판관 9명 중 최소 7명이 참여해야 사건 심리가 가능하다. 입법·사법·행정부가 추천한 재판관이 최소한 한 명은 참여를 보장하는 숫자가 7명이다. 국회 추천 3명이 공석이 된 과정에 정부·여당 책임이 없지 않으나 국회 과반의석을 가진 더불어민주당이 헌재 기능을 마비시키려 한다는 의심을 산다.


‘그놈의 헌법’ 발언 노 전 대통령


헌법의 수난사를 짚어보면 민주당의 흔적이 두드러진다. 첫 탄핵소추는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이 주도했다. 정치적 중립성을 어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킬 때 추미애·조순형 의원 등 당시 민주당도 동참했다.
헌재는 노 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헌법 65조가 규정한 ‘법률이 정한 공무원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의 기준을 제시했다. 헌법을 위반해도 정도가 심각한 경우라야 파면 대상이 된다. 헌재는 노 전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하면서도 파면하지 않았다.
탄핵으로 권한이 정지된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3월 21일 청와대 관저에서 책을 읽고 있다. 노무현사료관
이후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은 더 강해졌다. 이 와중에 ‘그놈의 헌법’이 나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대통령의 선거 중립의무 준수 요청’을 하자 노 전 대통령은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며 헌재 문을 두드렸다. 물론 기각당했다. 당시 헌법소원을 기자단에 설명한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민주당은 법관을 탄핵소추했다. 퇴임을 앞둔 임성근 전 판사 탄핵소추 과정엔 김명수 당시 대법원장이 등장했다. 김 전 대법원장이 임 전 판사의 사표를 거부하면서 “(국회에서) 탄핵하자고 설치는데”라고 말하는 녹취가 폭로됐다. 윤석열 정부에선 이재명 대표 관련 수사를 맡은 검사들이 민주당의 타깃이 됐다.
헌법은 민주주의의 원칙만 담았기에 오용해선 안 된다. 헌법연구관 출신인 김진한 변호사는 “재판에 적용하는 법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확실히 위험한 법”이라고 설명한다(『헌법을 쓰는 시간』).
1987년 헌법이 개정될 때 전문가들은 훗날 국회가 탄핵을 남용하리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당시 출간된 헌법학자의 책에는 “더욱이 우리나라의 탄핵제도는 소추 절차가 지나치게 엄격해 현실적으로 제약 요건이 많다”라고 씌어있다(허영 『헌법 이론과 헌법』).

묻지마 탄핵, 재판관 몽니 민주당


이정섭 대전고검 검사가 5월 28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리는 자신에 대한 탄핵 사건 2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변론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뉴스1
민주당은 이런 헌법에서 약점을 찾아냈다. 국회의 탄핵안 의결만으로 공직자의 직무가 정지되는 허점을 노린다. 지난 8월 헌재가 이정섭 검사의 탄핵을 기각하면서 “골프장 예약 편의 제공, 수사 무마 의혹 행위의 일시, 대상 등이 특정되지 않았다”고 했을 정도로 부실했다. 파면이 불가능한 내용이다.
재판관 3명의 추천을 미루면서는 헌재 심리 중단을 노렸을 것이다. 오죽하면 헌재가 사건 심리 등에 7명 이상의 요건을 규정한 헌재법 조항을 일시 무력화하는 가처분을 인용했을까.

민주화 운동 결실 스스로 허무나


현행 헌법은 치열했던 1987년 민주화 운동이 맺은 결실이다. 국민투표를 거쳐 민의를 반영했다. 이런 헌법의 약한 고리를 찾아내 정치 싸움에 끌어들이는 태도는 옳지 않다. 당시 개헌의 불을 지핀 민주화 인사들은 민주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이런 민주당이 눈앞의 이익을 좇아 헌법마저 악용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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