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슬의 숫자읽기] 스마트폰이 되살린 매독

2024. 10. 25. 00:1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한슬 약사·작가

매독(梅毒)은 신대륙에서 기원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천연두를 옮겼듯, 그네들도 새로운 성병을 되갚아준 셈인데. 신대륙의 은(銀)으로 지갑이 두둑해진 뱃사람들은 성병을 유럽 각지에 흥청망청 뿌려댔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먼 일본까지도 도달하게 됐다. 1944년 페니실린 대량 생산 이전에는 제대로 된 치료법이 없어 감염이 계속 확산하다, 항생제가 민간에서도 쉽게 이용 가능해지며 매독 환자 수는 급격히 줄어 1960년대 이후엔 드문 병이 됐다.

잊혔던 매독이 다시 호명된 건 2010년대 중반부터다. 완전 근절까지는 아니라도 잘 관리되는 수준에 머무르던 매독이 급작스럽게 폭증한 탓이다.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한 결과겠지만, 유의미한 요인 중 하나는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 보급 이후 위치 기반 데이팅 앱이 인기를 얻으며, 일회적 만남을 추구할 플랫폼이 생겼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데이팅앱 중 하나인 틴더가 2012년에 나왔는데, 그해 5만여 명 수준이던 미국의 연간 신규 매독 환자 수는 10년이 흐른 2022년엔 20만 명으로 4배 폭증했다.

김주원 기자

공교로운 우연이라기엔 다양한 연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미국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 연구는 데이팅 앱 사용자가 고위험 성관계를 가질 위험이 2배 더 높음을 보고했으며, 이탈리아 파도바 의과대학에서는 데이팅 앱 사용자의 성병 위험이 2.8배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성병 감염 시뮬레이션 연구에선, 데이팅 앱에서 콘돔을 사용하지 않던 남성의 절반만 콘돔을 착용해도 전체 인구집단의 성병 발생률이 약 25% 감소한다는 결과까지 나올 정도다.

먼 나라 얘기라기엔 우리나라도 상황이 좋지 않다. 질병관리청 자료를 보자. 매독을 제외한 성병만 보더라도, 질염이 10년 사이에 2배, 성기 헤르페스는 10년 사이에 3배 늘었다. 매독은 표본감시만 하는 정도로 관리하고 있었으나, 당장 이웃 나라인 일본은 10년 사이에 매독 환자가 12배 늘었고, 대만과 중국에서도 매독 환자 수가 꾸준히 증가 추이다 보니 올해부터는 매독을 전수검사로 변경했는데 1~8월까지의 환자만 약 1900명이다. 스마트폰을 막지도, 데이팅 앱을 금지할 도리가 없으니, 성교육을 내실화해서라도 젊은 층의 성병 전파가 느는 걸 막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슬프게도 학교 현장은 역행하고 있다. 동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청소년 유해도서로 낙인찍히는가 하면, 호주출판상(ABIA)이 올해의 청소년 도서로 선정한 성교육 도서가 보수성향 학부모단체의 민원으로 폐기되는 일까지 있었다. 더는 정보 통제와 엄숙주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교육 당국은 왜 이런 민원에 굴복해서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박한슬 약사·작가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