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의 시시각각] 똑똑한 바보들

김현기 2024. 10. 24. 00:5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대통령의 아내 걱정 이해하지만
김 여사로 힘든 국민은 어쩔건가
'업보' 주장하지만 이건 자업자득

김현기 논설위원

#1 용산 대통령실 인사들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에게 불만이 많다. 입조심·몸조심하느라 그런 목소리들이 외부에 새어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따금 볼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대충 요지는 이런 거다. "법무부 장관도, 비상대책위원장도 시켜달라고 해서 시켜줬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치는 게 말이 되느냐." 이런 말도 한다. "여당 대표라 하면 야당 당수인 이재명과 각을 세워 여당 대선후보가 돼야지, 어떻게 같은 편인 대통령에게 각을 세워 후보가 되려고 하느냐."

사흘 전 '81분 면담'은 이런 용산의 인식을 압축해 보여준 느낌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면담 장소에 도착한 한 대표를 25분 서서 기다리게 했다. 석 달 전 "우리 한 대표를 외롭게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빈말이었다. 산책하면서 경찰의날 행사를 화제 삼아 대화를 나누던 중 한 대표가 뭐라 말하자 대통령은 "아니지"라고 말을 끊었다. 반말이었다. '한남동 라인'으로 거론되는 비서관 등 참모들을 우르르 이끌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었다. '맞먹지 말라'는 메시지다. 식당에서의 훈시하는 표정, 자리 배치 모두 대통령실의 분명하고 의도된 작품이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즐겨 쓰는 방법인데, 그걸 윤 대통령이 썼다. 화룡점정은 추경호 원내대표 만찬 호출. 한 대표에 대한 사실상의 불신임 통보나 다름없다고 본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파인그라스 앞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대화를 하며 산책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이날 회동의 두 주인공을 보며 미국의 뇌과학 작가 크리스 무니가 썼던 말이 기억났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바뀌기 힘들다. 의견이 다르다는 말을 들으면 그냥 돌아서서 가버린다. 팩트나 숫자를 보여주면 자료의 출처를 의심한다. 증거를 부정하고, 신념을 보호한다." 책 이름은 『똑똑한 바보』다.

#2 용산의 '김건희 철벽'을 확인한 한 대표는 놀라움과 분노가 교차할 것이다. 바로 다음 날 밤 친한계 의원들을 대거 불러모은 이유다. 이대로 가만 있다간 당 대표 자리도 위태롭단 위기감도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대통령실은 다음 타자 박스에서 몸을 풀고 있는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대통령과의 정례회동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지난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국민의힘 의원들과 만찬 회동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한 대표의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 첫째는 즉각적 정면 승부다. 다음 달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1심 선고 전까지 용산의 액션이 없을 경우 윤 대통령에게 탈당 요구를 하고 나설 가능성도 있다. 이 대표와의 여야 영수회담에서 새로운 김 여사 특검법을 마련한 뒤, 온라인 당원 투표를 통해 '신임'을 묻는 선택도 있다. 적진의 자중지란을 지켜보는 이재명은 이미 '한동훈 맞춤 선물'을 준비해 놓고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완급을 조절한 세 불리기. 12월 예산 국회가 끝나면 현역 의원들은 사실상 용산과 정부의 눈치를 볼 일이 없다. 그때까지 국민을 겨냥한 메시지를 꾸준히 내놓으며 열심히 품을 팔아 '친윤'을 능가하는 지지세력을 야금야금 확보하는 전략이다. 다만, 이 두 선택지 모두 까딱 잘못했다간 보수 지지층의 거센 역풍을 맞을 수 있다.

23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2024 중앙포럼에서 만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화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솔직히 윤 대통령 입장도 조금은 이해한다. 면담 몇 시간을 앞두고 한 대표가 이 대표의 여야 영수회담 제안을 빛의 속도로 전격 수용한 것은 윤 대통령 입장에선 "와~ 이렇게 나를 압박하나"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아내에 대한 걱정도, 억울함도 한 남편으로서 공감한다. 힘들어하는 것도 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김 여사 때문에 훨씬 더 힘들어하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핵심이다. 아내 걱정과 아내 사태 수습책 마련은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국민은 지금 후자를 내놓지 않고 있음에 분노하는 것 아닌가.

윤 대통령은 한 대표와의 면담에서 "(김 여사 특검법에) 여당 의원들 생각이 바뀌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 이젠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업보(운명)가 아니라 자업자득이다. 귀를 막은 대통령이나 야당과 다를 게 없는 여당 대표나, 하여간 '똑똑한 바보들' 때문에 국민만 피곤하다.

김현기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