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동시다발 카드로 한반도 안보 지형 흔드는 북

정용수 2024. 10. 24.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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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1940년 10월 23일. 만주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 소속 항일 무장 단체인 동북항일연군의 조선혁명군(2군 6사)을 이끌던 김일성은 중국 훈춘을 거쳐 옛 소련의 국경선을 넘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8권)에서 “국제당(국제공산당)이 원동(극동)에서 진행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썼다. 하지만 당시 일본 관동군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피하기 위해 옛 소련으로 근거지를 옮겼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김일성은 일본군의 손이 닿지 않는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브야츠크 병영에 머물며 만주를 오가는 방식으로 항일 무장 활동을 하다 해방을 맞았다. 이런 인연으로 김일성은 소련의 지지와 후원을 등에 업었고, 북한의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김일성은 국제당 회의 참석과 근거지를 옮기는 문제를 놓고 오랜 시간 망설였고, 결국은 잘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 김일성, 1940년 옛소련 피신
84년 뒤 대규모 파병 움직임
정부, 우크라에 무기 제공 검토
우크라서 남북 무기충돌 가능성

김일성이 옛 소련의 국경을 넘은 지 84년이 지난 이달 초 북한군 대규모 병력이 러시아 땅을 밟은 정황이 한국 정보 당국에 포착됐다. 선발대 차원의 폭풍 군단 소속 1500명이 이미 러시아에서 현지 적응 훈련 중이고, 최대 1만2000명이 러시아로 향할 것이란 게 국가정보원의 판단이다. 살기 위해 근거지를 옮겼던 김일성 때와 달리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힘겨워 하는 러시아를 돕기 위해 나선 셈이다. 1960년대 수정주의자로, 1980년대엔 변절자로 옛 소련을 매도하며 비난하던 때와는 격세지감이다.

북한의 러시아 파병 의문점 몇가지

북한의 러시아 파병설이 돌고 있는 가운데 북한군이 러시아에서 전쟁 물품을 지급받고 있는 장면이라고 공개된 영상. [사진 SPRAVDI 페이스북 캡처 ]

북한과 러시아는 양국의 협력을 “주권 문제”라면서도 북한군의 파병을 공식 부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증거는 이어지고 있다. 북한군을 싣고 이동하는 러시아 함정을 촬영한 인공위성 사진이나 러시아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전쟁 물자를 지급 받기 위해 줄지어 있는 북한군의 영상 등이다. 러시아가 북한군의 군복과 모자 사이즈를 신청 받기 위한 설문지도 공개됐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궁금증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설문지에 인쇄된 글씨체는 국내 업체가 개발한 아래한글의 함초롱바탕체와 흡사하다. 러시아나 북한에서 아래한글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 설문지에 ‘러시아’로 표기돼 있는데 북한이나 러시아 모두 한글로 ‘러시아’를 표기할 때는 ‘로씨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설문지 작성자의 단순한 실수인지, 구글 번역기를 활용하다 벌어진 해프닝인지는 의문이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공개된 설문지엔 여름용 모자와 군복을 신청 받는 걸로 돼 있는 점도 미스터리다. 겨울 용품과 관련한 설문지도 있는데 일부만 공개됐거나 장기전, 또는 내년 여름 북한군의 투입을 염두에 둔 사전 신청일 수는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러시아에 북한군이 있다는 증거는 맞다”면서도 “보도(북한군의 러시아전 참전)가 사실이라면 우려스러운 상황”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하며 신중한 입장이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21일(현지시간) “우리는 이러한 보도를 계속 조사하고 있다”고도 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역시 다음주 초 한국 당국자들의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입장을 내겠다며 유보적인 태도다. 미국이 조만간 자체 조사 결과를 내놓겠다고 하니 이런 의문점은 풀릴 것으로 보인다.

남북 간접 전쟁으로 번지나
무엇보다 북한군의 파병설이 궁금증을 낳는 건 세계 2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러시아가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 지원이 필요한가다. 인민 사랑을 모토로 내세운 김 위원장 역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불가피한 전장에 군인을 몰아넣을 만큼 절실한지도 납득하기 어렵다. 국방정보본부는 북한이 200여 개의 군수 공장을 풀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러시아 수출용 무기 제조라면 북한은 이미 전쟁 특수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북한은 베트남 전쟁과 욤 키르프 전쟁(이집트)에 소규모이긴 하지만 조종사 등을 파병한 경험이 있다. 내전이 잦았던 아프리카 국가들에도 군사 교관단이나 군사 고문단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 국제사회가 북한의 파병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는 건 우크라이나 전쟁을 불법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엔 안보리는 북한과의 군사 협력을 금지토록 하고 있는데, 유엔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이를 대놓고 위반하는 결과인 것도 이유다.

북한의 러시아 파병은 한반도에 직접적인 위협 요소라는 점에서 남의 일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드론과 스타링크 인공위성을 활용한 현대전이다. 북한이 대규모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이런 첨단 전쟁을 치른 경험을 자국의 군사 교리에 적용할 경우 한국에겐 위협이 가중될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이번 참전이 지난 6월 러시아와 맺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에 따른 자동 개입 조항의 결과라면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군의 자동 참전 명분도 생긴다. 북한군의 파병 대가로 현금이나 첨단 군사기술이 북한으로 흘러갈 경우 대북제재는 무용지물이 되고, 한반도는 걷잡을 수 없는 격랑으로 빠질 수 있다.

정부는 단계적인 대응을 예고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23일 열린 ‘2024 중앙포럼’에 참석해 “북한은 파병 부대의 구체 행위에 따라 국제 형법상 책임이 부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우에 따라 북한이 신(神)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는 김 위원장이 전범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정부는 또 여차하면 포탄 등 대량 살상 무기까지 지원할 태세다. 이럴 경우 우크라이나 전장에는 남북한의 무기가 오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북한은 국제사회를 향해 동시 다발 카드를 흔들고 있다. 북쪽으로는 파병을, 한국을 향해선 한국군의 무인기 침투를 주장하며 핵위협까지 들먹인다. 미국 대선을 2주 앞둔 23일엔 김 위원장의 전략미사일부대 방문 사실도 공개했다. 북한이 핵을 만능의 보검이라고 여기며 3종 세트를 흔들고 있지만, 언제 북한과 러시아가 ‘변절’의 관계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옛 소련을 등지고, 김 위원장이 중국에 의지하다 돌아선 것처럼.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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