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촌 말과 달랐다... 새로운 블랙리스트 도구 등장
[원승환]
▲ 2023년 10월 30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 서대문구 모두예술극장에서 열린 출입 기자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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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장관은 "산하 기관들이 지원에 그치지 않고 사후 컨설팅까지 완성할 수 있도록 지속해서 관찰하고 돕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모든 지원 사업 심사가 600 ~ 1000명가량의 전문가 풀로 운영된다"라며 "현장 전문가란 분들이 심사하다 보면 손이 안으로 굽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기관 직원들은 전문가 심사라며 거리를 두니 책임질 사람이 없다"라고 부연했다.
그는 "예컨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콘텐츠진흥원, 영화진흥위원회 등 지원 기관 직원들이 심사 전문가가 돼야 한다. 직원과 함께 외부 전문가로 심사위원회를 구성할 것이고, 심사 담당 직원은 가급적 인사를 안 하도록 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책임심의제를 도입하는 것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차단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도 했는데 "책임심사위원이 있다면 어떤 청탁도 듣지 않을 것이다. 본인이 그 책임을 평생 갖고 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 한국콘텐츠진흥원(이하 콘진원),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책임심의제가 시범 도입되었다. 지난 1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문체위)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이기헌 의원은 '각 기관은 책임심의제 도입의 필요성과 기대 효과, 그리고 추진 방향 등에 대한 어떤 사전 준비나 연구도 없이 그저 장관의 지시에 따라 책임심의제를 도입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책임심의제를 추진한 문예위, 콘진원, 영진위는 직원이 심의위원으로 참여하는 것만 같을 뿐, 서로 다른 이름과 방식으로 책임심의제를 도입했다.
문예위는 책임심의제를 '전담심의제'라는 이름으로 도입했는데, 문예위 사무처 직무 공모를 통해 분야별 전담심의관을 선발하여 문예위 심의위원 후보단에서 위촉한 심의위원과 함께 심사하는 방식으로 추진했다. 2024년 문예진흥기금 지원 사업 추가 공모가 진행된 창작의과정(공연예술분야), 국제예술네트워크지원, 청년예술가도약지원,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예술지원 사업에 시범 도입했다. 웹사이트 등을 통해 전담심의제가 시범 운영된다는 것을 안내했고 전담심의위원 명단도 사전에 공지했으며 2025년에는 확대 적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콘진원은 '책임심의제'라는 이름으로 도입하고 '책임심의제 운영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시행했다. 심사평가의 전문성과 책임성 강화를 위해 내부 직원 1인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고, 2024년 콘진원의 16개 핵심사업의 선정평가에 시범 적용했다. 책임심의관은 평가위원과 관리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으로 역할 부여되었고, 심사 과정의 공정성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평가와 이해관계가 없는 제삼자가 평가장에 입회하는 평가참관인 제도를 병행 운영했다. 대한변호사협회 소속 변호사를 참관인으로 섭외하여 공정성을 점검하는 형식이다.
영진위는 '심의전문관' 제도라는 이름으로 도입했고, 2024년에는 지원 사업 중 배급/상영 분야의 영화제 및 전용상영관 지원 사업에 시범 도입했다. 심의전문관으로는 해당 사업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본부장이 참여했다. 별도로 마련한 심의전문관 제도 운용 지침은 없었고, 해당 사업 심의가 내부 직원이 참여하는 책임심의제로 진행한다는 공지도 없었다.
▲ 한상준 영화진흥위원장이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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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및 국제영화제 지원 사업은 2024년 예산이 전년에 비해 50% 삭감되고, 지원하는 영화제 수는 40개에서 10개로 줄어든 것으로 알려지면서 영화계가 크게 반발했던 사업이었다.
▲ 1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 중 이기헌 의원의 영화진흥위원회 책임심의제 질문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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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답변을 한 사람은 심의전문관으로 심사에 참여한 사업본부장이었다. 사업본부장이 심의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영진위원들의 의결과 다르게 10개 영화제만 선정하도록 유도했다. 본부장은 왜 영진위원들의 의결과 다른 내용을 심사 회의에서 관철하려고 했을까.
▲ 1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 중 이기헌 의원의 영화진흥위원회 책임심의제 질문 자료 |
ⓒ 국회방송 |
유인촌 장관은 책임심의제가 전문적이고 공정한 심사를 위한 제도라고 설명했지만, 영진위 사례를 보면 문체부 지시를 산하 기관이 그대로 집행하도록 하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과거 영화진흥공사는 국가 주도 행정기관이었고 표현의 자유를 바탕으로 영화를 진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화산업을 통제하던 비전문적 관료 조직이었다. 이 영화진흥공사를 민간 영화인들이 직접 운영에 참여하는 민간 중심의 행정위원회로 개편한 것이 영진위다. 영진위는 김대중 정부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운영을 보장한 예술지원 기관이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영진위를 정권의 블랙리스트를 실행하는 하수인으로 만들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밝혀진 이후 영진위는 블랙리스트를 실행하지 않는 자율적인 기관으로 개편되어야 했다. 영화인들은 블랙리스트 특위 등을 구성하여 영진위의 개혁을 도모했으나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며 이 노력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유인촌 장관이 문체부 장관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블랙리스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책임심사제는 유인촌 장관의 공언과 달리 예산으로 사업을 통제하면서 영화계 길들이기를 시도하는, 윤석열 정부 문체부의 불순한 의도를 실행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영화계는 영진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해괴한 일들이 새로운 유형의 블랙리스트는 아닐지 걱정하고 있으며, 영진위 사무국도 이미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블랙리스트가 실행되고 있다는 자조적인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예술 지원 기관이 어떤 방식과 기준으로 심사하여 지원 대상을 선정할 것이냐는 문제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해답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심의의 전문성과 지원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전담하여 심사하는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인이 반복하여 심사하면 다양한 예술과 창작자가 지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
오랜 시간 문화예술 지원 기관에서 일한 직원도 전문성이 쌓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지원 사업 심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수가 신뢰할 만한 자격 조건을 우선 제시하고, 조건에 맞는 직원 심의자를 투명한 과정을 통해 선정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책임심의제 도입은 충분한 사전 연구와 현장의 의견 수렴을 통해 결정되어야 하고, 시범 사업을 통해 엄밀한 평가를 한 후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책임심의제가 공정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점검하는 제도도 함께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관장, 전 영화진흥위원회 블랙리스트 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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