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그저 고요히, 한강이 사는 법

한승주 2024. 10. 23. 00:5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노벨문학상에도 들뜨지 않고
잔치 마다한 담담한 일상

만성 적자 독립서점 운영하고
작은 온라인 무크지에 글 연재

‘한강 기념관’도 원치 않아
산책하며 조용히 글쓰고 싶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날이었다. 낮에는 동네를 좀 걷고 책을 읽었다. 아들과 저녁 식사를 막 마쳤을 때였다. 오후 7시50분쯤,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큰 상을 받게 됐다는 전화가 왔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기사가 나고 전화벨이 연신 울리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날 밤 조용히 차를 마시며 자축했다. 이 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2024년 10월 10일 한국문학사에 길이 기록될 그날, 작가 한강은 이렇게 노벨문학상을 맞았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 수상이라는 것, 변방의 언어로 여겨지던 한국어로 된 문학이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 그의 주요 작품들을 통해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제주 4·3사건이 세계에 알려지고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것. 이와 더불어 나에겐 노벨상에 대한 그의 태도, 나아가 작가로서의 삶의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수상 소식에 충분히 흥분하고 들뜰 만도 했지만 그는 차분했다. 목소리는 단정하고 간결했다.

그의 글도 이런 그의 성품을 닮았다. 강한 주장들 속에 나지막한 목소리는 쉽게 사라지고 부서져버리는 세상에서, 작가는 조용하면서도 힘 있게 목소리를 내왔다. 아픈 역사를 풀어가는 방식은 피맺히는 절규가 아니라 시적이고 서정적인 접근이었다. 역사의 서사보다는 폭력에 맞선 개인에게 초점을 뒀다. 그의 소설은 역사성과 문학성을 함께 아우른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소설 ‘소년이 온다’)라는 문장처럼 그의 작품은 국경을 넘어 비슷한 역사를 가진 세계인에게 보편적인 주제로 받아들여졌다. 시로 데뷔한 작가인지라 산문에도 시적 감수성이 묻어난다. “눈이 하늘에서 내리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소설 ‘희랍어 시간’)는 한국어로 쓰인 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준다.

한강은 사려 깊었다. 지금도 전쟁으로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무슨 잔치냐며 떠들썩한 기자회견도 마다했다. 그런 마음과 태도가 드문지라 반가웠다. 한림원에 수상 소감을 밝히면서 “나는 어릴 적부터 한국문학과 함께 자랐다”며 공을 동료 작가와 독자들에게 돌렸다. 한강은 탁월한 작가인 동시에 빼어난 독서가이기도 하니 이런 말이 저절로 나왔을 것이다.

그는 예술적 동반자인 아들과 함께 만성 적자인 독립서점 ‘책방, 오늘’을 6년째 운영해 왔다. 3평 정도 작은 공간, 작가가 직접 고른 책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추천 메모를 붙였다.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의 생일에는 책을 선물하곤 했다.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식의 편지와 함께. 다정한 사람이다. 이미 세계 유수의 상을 휩쓴 작가였지만, 음악가 사진작가 전시기획자인 후배들과 함께 작은 온라인 무크지 ‘보풀 사전’에 글을 연재해 왔다. 노벨상 수상 후 공개된 첫 글도 여기에 올린 ‘깃털’이었다. 여기저기에서 한강 문학관과 기념관을 짓겠다는 요청이 밀려왔지만 그는 단호하게 어떤 건물에도 내 이름이 붙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지난주 포니상 시상식에서 노벨상 수상 소감을 밝혔다. 소감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일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는 술을 못 마시고, 최근에는 카페인도 끊고 좋아했던 여행도 거의 하지 않고 매일 조금씩 걷는다고 했다. 담담한 일상에서 쓰고 싶은 소설을 마음속에서 굴리면서 독자와 만날 것을 기다리는 시간이 행복하다고 했다. 50세에서 60세가 작가로서 황금기라면 앞으로 6년이 남았는데 그동안 책 세 권을 쓰는 일에 몰두하겠다고 밝혔다. “제 개인적 삶의 고요에 대해 걱정해 주신 분들도 있었는데, 저의 일상이 이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기를 믿고 바란다”라고도 했다.

그는 연작처럼 보이는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집필하면서 오랜 기간 매우 고통스러운 날을 보냈다. 글을 쓰면서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했다. 인간은 잔인한 존재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존재인가 하는 상반되는 질문 앞에 괴로워했다. 그의 작품은 그런 고통스러운 창작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이번 노벨문학상이 한국 문단의 영광이자, 작가 개인에게도 힘겨웠던 글쓰기에 대한 보상과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가 오래 머물고 있는 ‘겨울’에서 ‘봄’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