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요? 두부요리”…씩씩함 선물 받은 혈액암 11세 다엘이 [이건희 유산 4년]

문상혁 2024. 10. 2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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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 관장이 선천성 안질환을 앓고 있는 이예준(3, 오른쪽에서 두번째)군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예준 군 아버지 이주혁씨는 ″우리 가족에게 희망의 아이콘이라 사진을 청했는데 흔쾌히 응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주혁 씨 제공

열 한살 아이는 사회자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를 묻자 “두부 요리”라고 말했다. 평범한 말 한마디에 참석자들은 모두 환하게 웃었다. 김다엘(11)군의 씩씩한 목소리야말로 행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바라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21일 열린 행사는 소아암·희귀질환을 겪는 환아와 가족, 의료진이 만난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 함께 희망을 열다, 미래를 열다’였다. 행사의 취지와 바람이 다엘이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서울대병원 소아암·희귀질환 지원사업단은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대 어린이병원 CJ홀에서 열린 행사에서 4년째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성과와 비전을 공유했다. 다엘이는 그 주인공 중 한 명이다.
6년 전, 다섯살 다엘이 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대 어린이병원에서 급성림프모구백혈병 진단을 받은 것이다. 잦은 빈혈과 출혈 증상이 있는 혈액암의 일종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었다. 다섯 살부터 항암 치료가 시작됐다.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고 이젠 회복하나 싶었던 1년 전 봄, 병은 재발했다. 이젠 포기해야 하나 싶은 순간에 희망의 손길이 다가왔다. 고(故)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이었다. 전에는 시도하기 힘들었던 정밀한 치료가 시작됐다.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법(NGS)으로 미세잔존질환을 분석하는 검사(MRD)를 9번 받았다. 이렇게 급성림프모구백혈병을 치료한 건 세계 처음이다. 비용이 비싸고 표준화가 안 된 치료를 감행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현재 다엘이는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강형진 교수의 CAR-T(맞춤형 세포 치료제) 치료를 받고 회복 중이다. 강 교수는 “백혈병 환자가 주로 받는 조혈모세포 이식은 영구 난임·탈모 등 부작용이 있다. 그 대신 CAR-T 치료를 할 수 있었던 건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기부금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다엘이는 이제 엄마와 두부 조림을 만드는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뒷줄 왼쪽부터),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전 관장, 김영태 서울대병원장, 김용태 국회의원, 박중신 서울대병원 진료부원장, 아랫줄 왼쪽부터 최은화 서울대어린이병원장, 김다엘(11)군, 윤산(10)군, 명하율(14)군 등 내외빈이 2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어린이병원에서 열린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 함께 희망을 열다, 미래를 열다' 행사에서 기념 촬영하고 있다. 뉴스1뉴스1

이 선대회장의 유산으로 시작된 소아암·희귀질환 극복 사업 4년째를 기념하는 이날 행사엔 희망과 용기가 넘쳤다. 환아와 가족, 사업에 참여하는 전국 의료진이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고 희망과 용기를 북돋울 수 있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전 관장도 이 자리에 있었다. 이재용 회장은 이날 희귀질환 치료를 받고 있는 환아들을 만나 격려했다. '가성 장폐색'이란 희귀병을 앓는 윤산(10) 군이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로봇 조립이 취미"라고 소개하자 활짝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이 회장과 홍 전 관장은 이날 기념사진 촬영 외엔 무대에 나서지 않았다. 대신 행사 내내 자리를 지켰고, 환아·가족들의 사진 촬영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을 통해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이라고 강조했던 이 선대회장의 유지가 구현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어린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보살피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말했다. 이재용 회장 등 유족은 2021년 4월 소아암·희귀병 극복에 써 달라고 서울대병원에 3000억원을 기부하며 고인의 유지를 이었다. 같은 해 5월 서울대 어린이병원이 주관기관을 맡고 전국 병원·의료진이 참여하는 사업단이 탄생했다.

사업단은 2022년 3월 ▶소아암 ▶희귀질환 ▶공동연구 등 3개 사업부로 나눠 본사업을 시작했고, 9521명(지난 6월 기준)의 소아암·희귀질환 환자를 진단해 3892명이 치료를 받았다. 2만4608건의 코호트(추적조사를 위한 집단) 데이터가 등록됐고 202개 의료기관과 1504명의 의료진이 협력해 아이들에게 최적의 치료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차준홍 기자

이예준(3)군의 경우, 망막이 박리되면서 시력을 잃는 선천성 안질환 ‘가족삼출유리체망막병증(FEVR)’의 원인이 되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이 사업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세포 치료 연구도 진행 중이다. 예준이 아버지이자 소아희귀난치안과질환협회 대표 이주혁(34)씨는 "병의 원인도 모르고 살아갈 뻔 했는데, 이건희 기부금 덕분에 우리 가족이 병의 치료를 목표로 삼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건희 기부금이 소아암과 희귀질환 진단·치료·연구의 마중물로 불리는 이유다. 환자가 적고 주목도가 낮아 정부 연구비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했던 소아암·희귀질환에 새로운 미래를 연 것이다. 이지연 서울대병원 소아신경외과 교수는 “국가 연구비를 딴 적이 없었는데, 사업단이 비인기분야인 ‘소아 기형’ 연구의 지원을 결정해 자긍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1일 서울대어린이병원 1층 로비에 설치된 고(故) 이건희 회장의 부조상에 대해 최은화 소아암ㆍ희귀질환 지원사업단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소아암 사업에 1500억 원을 배정해 완치율 향상을 위한 치료 및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소아 희귀질환 진단 네트워크 및 첨단 기술 치료 플랫폼 구축 사업에 600억 원, 전국 네트워크 기반 코호트 공동연구에 900억 원이 배정됐다.
최은화 소아암·희귀질환 지원사업단장(서울대 어린이병원장)은 “이건희 기부금은 암과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들 위해 진단과 치료의 발판을 만들었다”면서 “현재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아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사업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차준홍 기자

문상혁 기자 moon.sanghy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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