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후된 시골이었던 곳에 AI 로봇이, 중국의 20년
[김성호 기자]
세계에서 격변한 국가를 꼽자면 빠질 수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기초적 제조업 기반의 후발산업국가가 어느덧 세계 과학을 선도하는 기술국가가 됐다. 미국은 세계 패권을 둘러싸고 신냉전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 중국과 극심한 경제적 갈등을 빚는다. 특정 품목에 대한 수출금지를 비롯한 경제제재, 에너지와 기술, 영유권을 둘러싼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외교와 에너지, 기술, 안보에 이르기까지 미국에 실제적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 없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갈등국면이다.
미국 등 서구주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무리 없이 편입됐던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일대일로며 중국몽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구상은 세계를 두고 장기 게임을 벌이는 대국의 전략으로 보아도 부족함이 없다.
▲ 풍류일대 스틸컷 |
ⓒ 부산국제영화제 |
중국의 성장 이면엔 수많은 내부적 문제가 자리한다. 제조업 기반 산업구조에서 대외경쟁력을 떠받친 근간은 농민공이라 불리는 이주노동자들이었다. 농촌 출신의 농민공들의 열악한 임금은 그대로 도시와 농촌, 또 부자와 빈자 사이의 심각한 격차로 이어졌다. 중국은 소득불평등을 측정하는 가장 효과적인 통계인 지니계수에서도 세계 최고수준의 수치를 받고 있다. 민간 연구기관 조사에선 당혹스러울 만큼 높은 추정치가 나와 충격을 던질 때도 잦다. 대외이미지와 국내소요를 우려해 중국 정부가 지니계수를 조작해 조사하고 발표한다는 얘기까지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다.
그럼에도 오늘의 중국이 한 해 한 해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기록할 만하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의 상전벽해, 또 전과 완전히 달라져 눈을 씻고 보아야 한다는 괄목상대가 중국을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사자성어로 떠오를 지경이다.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세계의 하청공장에서 첨단산업과 서비스업을 망라하는 신산업 모델로, 중국은 그야말로 발빠르게 변신했다. 근 몇 년 만에 중국 전토가 최첨단 철도망으로 연결됐고 러시아와 동남아시아, 인도와 서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신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부상할 준비를 마쳤다. 그조차 부족하여 반도체와 블록체인, 에너지 산업에 이르기까지 향후 세계 패권을 좌우할 기술경쟁에서도 미국에 좀처럼 밀려나지 않고 있다. 중국은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다른 나라다.
▲ 풍류일대 스틸컷 |
ⓒ 부산국제영화제 |
그런 의미에서 지아장커는 오늘의 중국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감독이다. <스틸 라이프> <산하고인> <강호아녀> 등 중국의 사회상을 내밀하게 살핀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온 지아장커다. 그가 지난 20년 영화인생을 총망라하는 작품을 새롭게 발표하니, 그게 바로 신작 <풍류일대>가 되겠다. 앞서 <스틸 라이프>부터 <강호아녀>에 이르는 촬영분 중 미처 쓰지 못했던 것, 또 썼지만 새로 영화에 반영할 수 있을 만한 장면들을 추려 이어붙인 게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혹자는 <풍류일대>를 새로울 것 없는 자기표절이라 말하고, 또 누구는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라 평가하기도 하는 것이다.
<풍류일대>는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으로 소개돼 큰 관심을 모았다. 영화제 기간 동안 따로 기자시사도 잡혔을 만큼 화제를 일으켰다. 거장의 신작을 추려 소개하는 갈라 프레젠테이션으로 초청된 건 예고된 일이라 해도 좋았다. 어느 모로 보아도 지아장커는 현 시대 중국은 물론 아시아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풍류일대>는 올 봄 열린 제77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동아시아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초청될 만큼 기대를 모으지 않았나.
▲ 풍류일대 스틸컷 |
ⓒ 부산국제영화제 |
때문에 전작을 보지 않은 이들은 긴밀하게 조응하지 않는 영상과 캐릭터에 당혹할 수도 있겠다. 서로 다른 작품의 캐릭터와 관계성이 동일한 배우라는 이유만으로 착착 감길 수는 없는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관성이 없지 않았던 지난 작품들이기에 <풍류일대>가 다루는 이야기가 무리하다고만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아장커 영화의 시작점인 다퉁으로부터 산샤댐 건설로 수몰되는 펑지에, 그리고 다시 다퉁으로 돌아오는 동안 배우들의 변화보다 더욱 두드러진 주변 상황의 변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낙후된 기색이 역력한 시골마을에 어느덧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오락거리라곤 함께 모여 정답게 노래를 부르는 일 뿐이던 공장터엔 인공지능(AI)이 탑재된 로봇이 손님을 맞는 마트가 들어선 것이다. 랩과 춤을 섞은 서양식 음악 공연이 이어지는 모습은 과거 전통민요를 수줍게 부르던 여공들의 얼굴과 상당한 괴리를 보인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또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선 이는 여전히 젊은 인간인 것이다. 겨우 20여년이 흘렀을 뿐이니까.
▲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
ⓒ 부산국제영화제 |
앞서 적었듯 <풍류일대>는 독자적인 영화로 존재한다 보기 어려운 작품이다. 지아장커 영화인생 전반을 정리하는, 즉 과거 이어온 여러 대표작의 이야기와 캐릭터를 그대로 빌려와 어긋나는 대로 맞추어 이어지게 만든 영화다. 남녀 주인공은 과거 작품에서 그러했듯 연인이었으나 오래 만나지 못했다가 뒤바뀐 세상에서 조우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차라리 영화의 주인공은 그들 남녀가 아닌 중국의 시대상 그 자체다. 후진적 산업국가에서 첨단 기술국가로, 세계의 주변국에서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으로 변화한 중국의 모습이 소시민적 감성으로 이를 조망하는 지아장커의 시선 너머 담겼다.
첸 카이거나 장이머우, 중국을 대표하는 다른 감독들의 작품에선 볼 수 없는 시선이다. 호들갑 떨지도, 아부하지도 않고 중국이 아닌 중국민의 시선에서 변화를 조망하는 것이 여느 날 선 비판보다 날카롭게 느껴진다. 또 한편으론 그 담담한 시선이 비추는 중국의 모습이 외부, 특히 미국 등 서구발 과장된 비판에 비하여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지아장커가 베니스와 칸 등 해외 유수 영화제로부터 거듭 높은 평가를 받는 데는 이러한 영향이 있었을 테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지아장커의 신작을 특별히 추켜세워 소개한 것 또한 적잖이 멋진 일이다. 온갖 논란과 부침에도 불구하고 부산국제영화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답게 아시아의 거장들을 높이 평가하고 다양한 시각을 포용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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