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명태균이 넘어버린 강

정현수 2024. 10. 21.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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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수 정치부 기자

한국 사회 ‘비선’ 용납하지 않아…
양계업자가 닭 가공 요리사가 될 수는 없는 노릇

김건희 공천개입 의혹의 핵심 인물 명태균씨가 최근 쉬지 않고 쏟아내는 발언 중 그나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던 말들이 있다. 김건희 여사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합류 요청을 거절했다는 게 명씨의 주장인데, 그때 그는 “(나는) 닭을 키워서 납품하는 사람이고, 닭을 가공할 사람은 많다”고 말했다고 한다. 명씨는 또 CBS 라디오와의 통화에서 “출마한 사람들은 선거라는 강을 건너야 정치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와 선거는 전혀 다르다”고도 했다. 정치를 하려고 마음먹은 이들이 선거라는 강을 건널 수 있게 그 강의 유량과 유속, 깊이를 알려주는 것이 자신이 그간 해 왔던 일이라는 설명이었다.

그의 이런 표현들을 가만히 곱씹다 보면 명씨 스스로 마음속에 그어놓은 선 하나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일단 선거라는 강을 건넌 다음에 펼쳐지는 정치의 영역은 완전히 새롭다는 것이다. 아무리 선거에서 공을 세운 이라 하더라도 이후 공적 영역인 정치에서 활동하려면 그에 걸맞은 자격을 새롭게 갖춰야 한다. 정치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의사결정은 국민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에 맞먹는 책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 의사결정이 최선이었는지,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적법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었는지는 언론과 시민단체들의 감시와 견제 대상이 된다.

국민들이 동의할 만한 최소한의 자격과 절차 없이 정치와 국정 운영에 개입하는 자들을 우리는 ‘비선’이라고 부르는데, 한국 사회는 이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명씨의 말마따나 양계업자가 갑자기 닭을 가공하는 요리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권력은 투명하게 드러나야 하고, 감시와 견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최서원(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 때 경험했다.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사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뒤돌아보면 모든 정권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됐다. 선거에 공을 세웠으니 이후 생길 권력에 일정 지분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 공적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다.

명씨와 관련된 온갖 의혹들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테다. 명씨가 정치적 숙주로 삼았던 김영선 전 의원 공천에 개입한 의혹은 그것이 사실이라면 집권 여당의 최상위 의사결정에 개입하려 했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김 전 의원이 재보궐 선거에서 5선 의원 타이틀을 단 뒤 2022년 국회부의장 선거까지 나섰던 점을 상기하면 그야말로 정신이 아득해진다. 최근 새롭게 제기된 2023년 창원 산단 선정에 관여했다는 의혹도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국정 운영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다. 그가 언론을 통해 연일 쏟아내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 그리고 김건희 여사와의 관계는 이런 의혹들을 강화하는 정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명씨 사태를 갑자기 튀어나온 일회적 사안으로 보기도 어렵다는 점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명씨를 둘러싼 의혹이 언론을 통해 한 달 넘게 보도되면서 온갖 여권의 유력 정치인들 이름이 오르내렸다. 하나같이 “명씨에게 신뢰가 가지 않아 애당초 ‘손절’했다”며 선을 긋지만, 되레 명씨는 “자신 있느냐”며 큰소리 치는 판국이다. 대통령실 역시 ‘오빠 논란’을 비롯해 명씨가 터뜨리는 무차별 폭로성 발언에 명쾌하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혼란을 키운 측면이 있다.

이번 사태의 분기점은 여론조사 조작 의혹을 폭로한 강혜경씨의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 증인 출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강씨의 증언을 통해 그간 명씨가 던져놓은 그물이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를 계기 삼아 5년 임기의 반환점을 앞둔 윤석열 정권도 스스로 시스템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국민들이 자꾸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너고 있다고 지목하는 이가 단순히 명씨만은 아니지 않은가.

정현수 정치부 기자 jukebo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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