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에 시집간 새댁? 일본 불편하게 만든 여성의 진짜 정체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한국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 최대 요인은 먹고 입고 쓰는 것의 주도권을 빼앗긴 데 있다.
조선에 대한 일본과 러시아의 압력이 점증하는 상황을 우려하던 청나라는 1882년에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파병한 것을 기화로 그 뒤 12년간 고강도 내정간섭을 벌였다. 그 기간에 청나라는 자국 기업과 상인들의 조선시장 석권을 지원했다. 하지만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 밀려 실패했고, 여기에 더해 1894년 청일전쟁에 패전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다.
자국 정부가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장악한 속에서도 청나라 기업들은 앞서가는 일본 기업들을 끝내 따라잡지 못했다. 청나라가 내정간섭을 실시하기 6년 전인 1876년에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체결되고 이를 발판으로 일본 기업들이 조선 시장을 선점한 결과였다. 일본의 경제침략이 6년 빨랐던 것이 두 나라의 경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본 기업들의 조선 진출은 제국주의적 위협과 불평등조약 체결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경제 침략의 성격을 띠었다. 이런 경제 침략을 배경으로 일본이 조선인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됐다. 이것이 청나라의 내정간섭 속에서도 일본 기업들이 영향력을 유지한 핵심 요인이다. 그 6년간 있었던 경제 현상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니, 한국이 식민 지배를 받게 된 것은 먹고 입고 쓰는 것의 주도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만식 등이 주도한 조선물산장려회의 취지문은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거의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라며 "이것이 세상에 제일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을 오늘에야 우리는 깨달았다"라고 한 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써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이라고 호소했다. 먹고 입고 쓰는 것의 자주권을 빼앗긴 일이 국권침탈로 이어졌음을 자각하는 글이다.
▲ 1931년 1월 20일 자 <동아일보> 기사 '창립대회 마친 부인소비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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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 활동을 벌인 무대는 강원도 원주다. 여성 수십 명의 단체사진이 인상적인 1931년 1월 20일 자 <동아일보> 기사 '창립대회 마친 부인소비조합'은 노순열과 김몌례 등이 이 지역 여성계의 중견이라는 점을 언급하면서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김몌례를 김메례로 표기하는 당시의 표기법대로 옮긴다 .
"강원도 원주군 읍내에서는 수개월 전부터 당지 녀자게(女子界)의 중견인 김메례(金袂禮), 로순열 녀사 이외 10여 인의 발긔로 원주부인소비조합을 조직코저 노력한다 함은 긔보(旣報)한 바어니와, 그간 전긔(前記) 제씨(諸氏)의 활동으로 모집된 조합원이 동(同) 읍내에만 이백여 명에 달할 뿐 아니라 부근 각촌에도 가입 지원자가 적지 안하서 사업 착수의 용이한 수확을 엇게 됨으로 지난 13일 오전 11시부터 동지(同地) 정신유치원 내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임원 선거와 규약를 가잇슨 후 동(同) 오후 4시에 페회하얏다 한다."
기사는 김몌례가 조합장이 되고 노순열이 이사장이 되는 외에 이사 15인과 감사 여럿이 선출됐다고 보도했다. 꽤 규모 있는 지역 조직이 꾸려졌던 것이다.
이 시기의 소비조합은 상당히 폭넓은 활동을 수행했다. 1925년 11월 24일 자 <조선일보> 2면 우중단에 나오는 경북 영주군 평은면 사례는 소비조합이 회원들의 삶과 일상을 하나로 묶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기사에 따르면, 최대 180가구의 참여하에 석씨 문중의 주도로 그해 7월 5일 결성된 이 지역 소비조합은 3리 떨어진 영주시장을 왕래하는 불편을 덜자는 취지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회원의 일상 전반에 대해 구속력을 발휘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기사에 따르면, 이 조합은 회원들이 납부한 금전과 곡물을 이용해 일용품 공동 구입은 물론이고 종자 개량, 자금 융통 같은 사업도 했다. 또 예금을 수납하고 농산물의 공동 판매를 실시했다. 거기다가 교육기관의 기능도 수행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야학을 열었다. 은행과 학교와 농업연구소의 역할도 겸했던 것이다.
회원들은 끼니마다 조합을 생각하게 돼 있었다. 기사는 "음력 구월 일일부터 저축 사업으로 매호에 때마다 밥쌀에서 백미 한술식 모하서 그달 말일마다 조합 사무실로 가져오게 하얏는데, 이것도 매우 자미잇게 진행된다 하며"라고 전했다. 밥을 지을 때마다 쌀 한 숟갈씩 모았다가 조합에 저축하도록 했던 것이다.
노순열이 김몌례 등과 함께 주도한 원주 소비조합이 영주 소비조합과 똑같이 운영됐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지역민의 일상에 깊이 개입하는 이 운동은 대중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 기업이 만든 제품이나 일제 국가권력이 감독하는 금융조합 등으로부터 한국인들을 떼어놓는 일이었다. 또 지역민들이 일제 순사나 친일적 유지들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노순열 같은 운동가들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기능도 했다.
▲ 3.1운동을 표현한 조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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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열 역시 그런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이 점은 그가 1919년 3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이 당시는 법원 소속)의 신문을 받은 데서도 나타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 근대사료 DB>에 저장된 이 신문조서에 따르면, 그는 "이름·연령·신분·직업·주소·본적 및 출생지는 어떻게 되나?"라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답하면서 "신분과 직업은 여자고등보통학교 생도입니다"라고 말했다. 중등학교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재학 중에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 전에 그는 박희도 목사가 운영하는 비밀 서클에 참여했다. 그 박희도가 민족대표 33인이 되어 3·1운동에 참여했다. 검사는 "그쪽은 예수교 신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습니다"라는 답이 나오자 "3월 1일에 박희도로부터 조선 독립의 일을 들은 일이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노순열은 "없습니다"라고 부인했다.
이 같은 검찰 신문조서가 남아 있는 데서도 확인되듯이 그는 3·1운동 당시 거리로 뛰어나가 "대한독립 만세!", "일본 나가라!" 등을 외치다가 체포된 인물이다. 그런 그가 그 후 교사가 되고 얼마 뒤 원주에서 소비조합운동을 벌였다. 그 시절 소비조합운동이 항일운동의 성격을 띠었다는 점은 그의 3·1운동 경력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원주 생활을 한 것은 1925년 3월에 결혼한 이후였다. 당시로서는 늦게 결혼한 편인 그는 시댁 동네인 이곳에서 대중운동을 열심히 벌였다. 그가 원주에서 소비조합 결성에 참여한 것은 결혼 7년 차인 1931년이다. 그의 이 지역 대중운동은 그 전부터 있었다.
결혼 3년차 때 발행된 1927년 8월 30일자 <조선일보> 4면 좌하단은 원주노동회가 주최하는 그달 22일 강연회에서 노순열이 '노동 농민의 단결'이라는 강의를 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의 1928년 12월 16일자 4면 중하단은 원주에서 열리는 여성 야학에 노순열을 비롯한 교사 6인이 참여한다고 보도했다. 원주에 시집간 새댁이 노동·교육·소비조합 등의 분야에서 맹렬한 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2021년에 나온 김이경의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일제하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형성과 전개'는 "1919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설립된 협동조합은 최소 500여 개"라고 설명한다. 금융조합 등을 내세워 식민지 한국을 자신들 중심으로 통합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를 무시하는 움직임이 꽤 많았던 것이다.
그 모든 단체가 다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과 관련됐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먹고 입고 쓰는 것을 일제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마인드를 가진 운동가들이 소비조합을 비롯한 협동조합운동에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독자적인 생활공동체 건설을 추진하면서 한국인의 일상을 일제와 떼어놓는 활동을 끊임없이 전개했다. 이는 일제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대중 속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의 내면에 남아 있는 항일정신 혹은 반일정신과 무관하다고 보기 힘들다.
노순열은 국가보훈부가 지정하는 독립유공자는 아니다. 하지만 소비조합운동이라는 대중 밀착형 항일운동을 통해 한국인의 일상을 일제로부터 떼어내는 일에 참여했다. 이런 독립운동가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을 제대로 조명하는 것은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새로운 차원으로 안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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