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뚜 뜨리" 영어 인사에 깔깔, 이 학교가 특별한 이유 [정진동 평전]

박만순 2024. 10. 20. 18:5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진동 평전] 농촌선교와 교육사업

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 호죽교회 호죽교회(좌)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우)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원 뚜 뜨리." "굿모닝." "예스."

학교 교실에 모인 친구들은 각자 영어를 구사하며 아침 인사를 했다. 굿모닝은 그렇다 쳐도 '예스'와 '원 뚜 뜨리'는 아침 인사와는 아무 관련성이 없는 단어인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영어 단어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이 정진동으로부터 배운 영어를 원 없이 구사했다. 특히 "원(One) 뚜(Two), 뜨리(Three)"는 교장 겸 영어 교사인 정진동이 발음한 대로 따라 한 것이다. 발음이 틀리든 말든 까까머리 개구쟁이들은 영어로 인사를 나누고 '깔깔깔' 웃음을 뜨렸다.

정진동이 교실에 들어서자 반장이 "차려. 교장 선생님께 경례"라고 하자 학생 십여 명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정진동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다. 1960년 당시 충북 청원군 옥산면 호죽리 아이들에게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낯선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순신이라는 명장이 수군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어제는 영어를 가르쳤던 정진동이 그날은 왜 역사 교사가 됐을까? 당시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는 교장인 정진동이 영어 겸 윤리, 역사, 사회를 전부 가르쳤다.

사라진 '어른 흉내 내기'

가좌국민학교와 금계국민학교를 졸업한 호죽리와 인근 아이들은 희망이 없었다. 기껏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부모 따라 농사지을 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뼈 빠지게 일해도 굶어 죽기 십상인 것을 부모의 삶을 통해 학습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일부 친구들이 검정 교복을 입고 인근 중학교로 등교하는 모습을 보면 한없이 부러웠다. 부러운 만큼 자괴심이 커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던 차에 호죽교회 목사 정진동이 1960년 3월 기존 '중등성경구락부'를 '고등공민학교'로 개명해 교육청으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았다.

호죽리 피기성(당시 14세, 제1회 졸업생)과 친구들은 공민학교가 만들어진 이후 생활이 180도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10대 중반의 아이들이 술과 담배를 하며 어른 흉내 내기에 바빴다. 심지어 화투를 일삼기도 했다. 어른들이 혼쭐을 냈지만 뒤돌아선 아이들의 생활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가 만들어지면서 아이들의 '어른 흉내 내기'는 완전히 없어졌다.

1957년 대한신학교 4학년 시절부터 호죽교회 전도사를 맡은 정진동은 1958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호죽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호죽교회는 1936년 강수복의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린 이래 1940년 충북노회 소속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정진동이 부임 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고등공민학교의 설립이었다. 이는 청소년들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엿봤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한 설움과 한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정진동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더이상 없기를 바랐다. 목회자인 동시에 교육자, 휴머니스트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교수, 검찰수사관, 목사를 배출하다
▲ 제2회 졸업식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 제2회 졸업식. 미국 선교사, 옥산면장, 우체국장 등이 참석했다.
ⓒ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 총동문회
정진동이 1961년 진천 덕산교회로 부임하면서도 1년 동안은 호죽리로 와서 성경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도 영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정진동의 호죽리에서의 목회 및 교육 기간은 3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정신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는 1962년 11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1978년 16명의 제17회 졸업생을 배출을 끝으로 폐교됐다. 인가 이래 16년간 운영되면서 27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런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도 하차한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약 500명이 이 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 졸업생 중에는 사회 각계로 진출해 전문직에 종사하고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인 이들이 유독 많다. 제1회 졸업생 피기성은 관광사업을 하고 이태원에서 대형음식점을 운영했다.

제2회 졸업생 강규열은 베트남전에 참전 후 현대건설에 취업해 노동조합 위원장을 맡았다. 정년퇴직 후에는 토목공사 사업을 해 광주지하철 건설 때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 총동문회에 적극 참여했다.

제14회 졸업생 박상덕은 특이한 경우다. 정진동의 처조카이기도 한 그는 1970년대 초반 학교에 다녔다. 그는 사실 고등공민학교에 다닐 정도의 경제적 형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엄마 조정순(1937년생, 정진동의 처제)이 "형부가 만든 학교에 내 자식을 안 보내면 말이 되나!"라며 입학시킨 것이다. 국민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이들과 돈 있는 아이들은 옥산중학교에 입학시키던 시절이었다.

수재였던 박상덕은 부모의 의사에 따라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를 다녔다. 이후 충북대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쳤다. 현재는 강릉원주대학교 교수로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밖에도 고위 교육공무원을 지낸 이장길, 서울지하철공사 소장을 역임한 박광한, 대검수사관 박계환, 양희옥과 곽노임(여성) 목사 등이 이 학교 졸업생이다. 이런 유명 인사만이 자랑스러운 졸업생은 아니다.

졸업생 모두, 아니 중도 하차한 학생들까지 전부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정진동이 만든 이 학교는 졸업생과 한때 학교에 적을 뒀던 이들 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 성탄절 호죽교회 성탄절 예배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괴나리봇짐

"여가 정진동 목사님 댁(宅)유?"
"아니유. 일루 따라 와유."

진천 덕산교회 정은용 집사 일행이 묻고, 호죽리 도람말 주민이 답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던 정진동의 집에는 정작 찾는 이가 없었다. 청주에 볼일 보러 간 것이다.

다음날인 1961년 2월 12일 정진동은 괴나리봇짐을 싸 정은용 집사 일행을 뒤따랐다. 오창까지 걸어가 충북 진천군 덕산면 용목리로 갔다. 진천중앙교회 임도준 목사의 소개로 덕산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면소재지에 있는 교회라고는 하지만 당시 덕산교회는 정진동이 3년간 목회 활동을 벌인 호죽교회보다 시설이 형편없었다. 사실 덕산교회는 출발이 초라하다 못해 애처로운 수준이었다.

1955년 여름방학을 맞이한 숭실대 학생들이 덕산에 내려왔다. '하기 전도대회'에서 꼬맹이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어른들은 그렇다 쳐도 아이들은 덕산 장터의 공회당에서 열린 '하기 전도대회'가 마냥 즐겁기만 했다.

대학생 누나, 언니, 오빠, 형들이 가르쳐 주는 노래와 율동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기껏해야 친구들과 숨바꼭질과 자치기, 사금파리 놀이나 하던 그들에게 전도대회는 신세계 그 자체였다.

여름방학이 끝나 숭실대 학생들이 서울로 돌아가자 꼬맹이들 어깨가 축 처졌다. 그들은 여름 한 달간의 즐거운 추억을 잊지 못해 장터로 모였다. 아이들은 숭실대학교 학생들로부터 배운 복음성가만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누가 설교를 하고 예배를 인도해 주는 이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날 장터를 지나가던 청년 정은용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 군대에서 막 전역한 그는 아이들을 보고 감격했다. 군대에서 교회를 처음 다니기 시작한 그가 아이들을 보고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청주에 있던 충북노회 선교부에 천막을 요청했다. 선교부에서 보낸 군대용 천막에서 촛불을 켜고 정은용과 초·중등 학생 7~8명이 예배를 본 것이 덕산교회의 출발이었다. 그랬으니 그때로부터 6년밖에 되지 않은 1961년도에 덕산교회가 번듯한 교회일 수는 없는 일이다.

동아줄로 길 막아
▲ 배구 염광고등공민학교 학생들이 배구하는 모습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솔방울과 광솔, 나무를 넣은 깡통에 불을 피운 아이들이 통에 매달은 철사를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못으로 뚫은 깡통의 구멍에서는 불티가 날리기 시작했다. "개불여 쥐불여"라고 외치며 쥐불놀이에 신명이 난 아이들은 불티가 학교 지붕으로 날아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덕산교회 맞은편에 있던 염광고등공민학교가 불덩이로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본의 아니게 불을 낸 아이들은 겁을 먹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뒤늦게 달려온 어른들이 대야와 양동이로 정신없이 물을 퍼 날랐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초가(草家)의 새까맣게 탄 서까래 사이로 연기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그 사이로 어른들의 한숨과 아이들의 훌쩍임이 있었던 것은 음력 정월 대보름 하루 전인 1969년 3월 2일 밤이었다.

홀라당 탄 학교 앞에서 정진동은 망연자실했다. 정진동은 부임하던 다음해인 1962년 성경구락부를 염광고등공민학교로 바꾸어 교육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정진동은 옥산 호죽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진천 덕산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중등학교를 만든 것이다.
▲ 염광고등공민학교 재건축 염광고등공민학교 재건축. 좌측이 정진동.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불탄 대지 위에 다시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었다. 지붕은 쓰레트로 했다. 벽으로 사용할 부로크(시멘트 벽돌)를 찍는데,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정진동이 서울, 청주 등지로 다니며 후원을 받았지만 부로크 찍기는 자주 중단됐다. 교인들과 공민학교 학부형들이 자원봉사를 했지만 현금이 드는 문제는 대책이 없었다.

정진동이 아이들과 함께 머리를 맞댔다. 며칠 뒤 진천 덕산과 음성 맹동 사이의 국도에서 버스가 멈췄다. 양쪽에서 네 명의 아이가 동아줄로 길을 막은 것이다. 운전수가 의아해서 차 문을 열었다.

등짝에 얼음통을 맨 아이가 버스로 올라오더니 '아이스께끼' 하나를 운전수에게 주었다. 그러더니 승객들에게 "저희는 공민학교 학생입니다. 저희 학교가 불타 버려서 다시 짓는데, 돈이 필요합니다. 10환이든 100환(당시 화폐 단위)이든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버스에 탄 승객들은 아이들이 기특해서 쌈짓돈을 털었다. 그렇게 해서 적지 않은 돈이 모아졌다.

앙고라 토끼
▲ 가나안농군학교 가나안농군학교 제1단계교육 농목과 제5기 수료기념. 1971.6.5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아카시아 잎이나 씀바귀를 따와라" 정진동의 말에 아이들은 신이 났다. 지천에 널린 아카시아 잎이나 씀바귀를 따오면 수업료가 면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진동은 왜 아이들에게 그런 일을 시켰을까?

그는 덕산교회에 부임한 이후 염광고등공민학교 설립과 더불어 '농촌 잘살기 운동'에 골몰했다. 고민의 결과가 앙고라 토끼와 닭 기르기였다. 그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경기도 광주(현 성남시)에 있던 '가나안농군학교'에 견학을 하고 나서부터였다.

처음에는 교회와 학교에서 기르다가 농가 수입 증대 차원에서 분양을 했다. 당시 정은용(1930년생)도 앙고라토끼를 분양받았다. 정진동의 아내 조정숙도 열심히 키운 앙고라토끼의 털을 깎았다. 물레를 구입한 그녀는 털로 실을 자아서 스웨터를 짰다. 실이 곱지 않아 목과 어깨가 축 늘어진 스웨터를 본인도 입고 친정아버지께도 드렸다.

1967년 10월 7일 청주에서 병아리 1500마리를 구입해 가정마다 분양했다. 하지만 농촌 잘살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앙고라 토끼와 닭 키우기는 성공하지 못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