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세, 가족과 함께 만주 망명

김삼웅 2024. 10. 2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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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 5] 우리 집안에 경술국치의 비보가 미친 충격은 컸다

[김삼웅 기자]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밭을 경작하고 있는 모습
ⓒ 독립기념관
3.1혁명은 좌절되었지만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뜻 있는 청년들과 우국지사들이 만주·중국으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의 길에 나섰다. 망명을 결심한 유림은 우선 가정사의 정리에 나섰다.

1915년 2월 아들이 태어났다. 유원식(柳原植)이다.

내가 안동 월곡면(예안읍) 계곡리에서 태어나자 아버님 단주 유림께서는

"망한 나라 호적에 내 자식의 이름을 얹을 수 없다."

고 하시며, 출생 신고마저 하지 않았다.

항일 지사의 명문가로 당대 선각자의 한 분이었던 안동 출신의 집안 어른 동산 유인식 선생의 훈도를 받으며 향리에서 일찍이 협동학교를 마친 아버지는 종(노예)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 면전에서 종문서를 불살라 해방을 선언하는 등 포부를 지니신 분이었다.

그런 우리 집안에 경술국치의 비보가 미친 충격은 컸다.

나라를 빼앗긴 울분으로 문중의 11명 반이 절곡으로 자진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가친께서는 소극적인 절명보다는 적극적인 구국운동에 헌신할 비장한 결의를 새기며 '충군애국'이라는 혈서를 쓰시기도 했다. (주석 1)

유림은 당시 26세였다. 해외 망명을 결정하면서 단신이냐 가족과 함께 가느냐를 두고 고심했다. 아버지가 몇 해 전 별세하여 어머니와 부인, 네 살 된 아들이 있었다.

이 민족의 자존을 위한 거대한 외침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이제는 나름대로의 강한 자의식을 갖춘 26세의 청년 유림은 향리인 안동지방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후 가산을 정리,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갔다.

식솔이라 해야 모친과 부인 그리고 어린 아들 원식(당시 4살)이 전부였다. 당시는 이미 부친이 사망했기에 그가 집안의 가장이었고, 따라서 북행의 결단에 따른 가산의 처분도 그리 어렵지 않았을 듯하다. (주석 2)

수중에 재산을 처분한 적잖은 자금이 있었지만 만주는 산설고 물 설은 이국 땅이었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먼저 온 한인들도 더러 있었으나 만주인들과 섞여서 함께 살아야 했다.

우리 집은 봉천성 요중현에 자리잡았다. 질펀한 광야에 있는 우리 가정형편은 그 당시 한인 동포 중에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 가세였다.

요중현 일대에서 우리나라 큰 도(道)에 해당될만한 광활한 토지를 경작하게 되었는데 사나흘 동안을 두고 걸어도 남의 땅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의 대지주로 사병(私兵)도 4백명이나 양성하는가 하면, 지방에서 통용하는 화폐도 발행하는 형편이어서 그 한때 우리 가세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주석 3)

인용한 이 대목은 착오이거나 다소 과장인 듯 하다. 당시 만주는 청국의 영지로 외국인이 그토록 많은 농지와 사병(400명)을 거느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림의 가족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서 망명 초기에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는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유림이 고국을 떠난 것은 안일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얼마 후(19년 말에서 20년 초로 추정) 유림은 그 토지들을 모두 매각 처분, 막대한 군자금을 마련하자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봉천성을 떠났다. 남만주 요녕성 유하현의 삼원보를 향해서였다. 당시 그곳에서 이상룡·이회영·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남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총본영 격으로 조직한 서로군정서가 웅거하고 있었다. (주석 4)

양기탁·안창호 등의 주도로 국내에서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는 국내활동이 어렵게 되면서 1909년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1911년 이미 망명하여 터를 닦아온 이회영·이상룡·여준·이청천·김동삼 등에 의해 삼원보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백서농장, 부민단에 이어 독립군양성을 위해 신흥무관학교와 재만 동포들의 자치기관으로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유림은 서로군정서에 합류하였다.

서로군정서에 합류한 유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서에서 활동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군자금 모금을 위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지만, 서로군정서의 비밀특파원격으로 국내를 두 번에 걸쳐 잠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향에 일부 남겨둔 토지를 모두 처분한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주석 5)

무장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기금이 필요했다. 이회영 일가와 김동삼 일가가 가져온 기금이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투자되었듯이, 유림이 가져온 기금도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 운영에 들어갔다.

만주생활이 비록 망명지에서의 나날이긴 했지만, 온 집안이 독립군들로 들끓어 유복하고 보람된 유년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을 오래 계속되지 아니하였다. 독립운동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그곳 일대의 토지와 가옥 등 일체의 재산을 매각 처분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군자금을 마련해가지고 급기야 요중현에서 먼 곳으로 떠나가셨다. (주석 6)

주석
1> 유원식, <5.16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 28~29쪽, 인물연구소, 1987.
2> 김재명, 앞의 책.
3> 유원식, 앞의 책, 29~30쪽.
4> 김재명, 앞의 책.
5> 앞의 책.
6> 유원식, 앞의 책, 3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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