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집 스트리퍼, 女기자 안락사 여행…칸·베니스 수상작 붙는다

나원정 2024. 10. 2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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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칸 대상 수상작 극장가 맞대결
스페인 거장 알모도바르 ‘룸…’ 23일
美독립스타 베이커 ‘아노라’ 내달 6일
죽음·성노동자 화두 '색채 마법사' 격돌
제7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노라'가 11월 6일 개봉한다. '아노라'는 이민자 출신 스트립 댄서 아노라(미키 매디슨)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과 충동적 결혼 후 시댁의 이혼 종용에 시달리는 짧은 여정을 통해 신데렐라 판타지를 풍자한 블랙코미디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올해 칸 국제 영화제 황금종려상,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 2주차로 개봉해 맞대결한다.
여성 스트리퍼와 러시아 재벌 2세의 신데렐라 스토리 ‘아노라’(션 베이커 감독, 11월 6일 개봉)와 친구의 불법 존엄사에 동참하는 여성 작가의 비밀스런 여행기 ‘룸 넥스트 도어’(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23일 개봉)다. 국내 팬덤을 쌓아온 두 감독이 각각 성 노동자와 죽음이라는, 전작 화두를 파고들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뉴욕을 무대로, 독립적 방식으로 제작했다. 뉴욕의 극과 극 모습을 담은 아트버스터의 격돌이다.


스페인 거장·틸다 스윈튼 존엄사 지지 '룸…'


제81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룸 넥스트 도어'(23일 개봉)는 암투병 중인 전직 종군기자 마사(틸다 스윈튼)가 젊은시절 같은 잡지사 동료였던 작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에게 자신이 안락사하는 순간을 함께해달라고 부탁하며 벌어지는 여정을 그렸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룸 넥스트 도어’는 스페인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75) 감독이 틸다 스윈튼, 줄리안 무어와 함께한 첫 영어 장편영화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지지한 작품으로,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장 18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황금사자상 수상 후 그는 “이 세상에 깨끗하고 품위 있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기본적 권리”라는 소감을 밝히며, 스페인과 달리 안락사가 불법인 미국 등을 비판하기도 했다.
미국 소설가 시그리드 누네즈의 장편소설 『어떻게 지내요』에 매료된 알모도바르 감독이 이를 토대로 각본을 겸했다.
‘룸 넥스트 도어’에서 말기암인 전직 종군기자 마사(틸다 스윈튼)는 병문안을 온 옛 직장 동료이자 작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에게 자신의 비밀 안락사 여행에 동행해주길 부탁한다. 잉그리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담은 신작을 갓 발표한 참이다. 그는 뉴욕 우드스탁 인근 숲속의 호화 임대 주택에서 매일 아침 마사의 빨간색 방문을 마음 졸이며 확인한다. 그 문이 닫혀있으면, 마사가 안락사 약을 먹었다는 뜻이다.
마사는 왜 동행자로 더 가까운 사람을 택하지 않았을까. 마사의 딸 미셸은 왜 베트남전 후유증을 앓던 아버지와 작별한 엄마의 속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우정과 사랑의 미묘한 무게감이 생사의 문턱을 넘나든다.
스윈튼은 최근 할리우드리포터 인터뷰에서 자신이 임종을 지킨 두 불치병 감독 친구들의 사례를 언급하며 “동물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날 은혜를 주면서 인간에겐 허락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존엄사를 옹호했다. 무어는 “여성의 우정을 탐구한 이례적 영화”라고 자평했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맨 오른쪽부터)과 주연 배우 줄리안 무어, 틸다 스윈튼의 촬영 당시 모습. 영화에는 또 다른 죽음에 대한 경고도 나온다. 마사, 잉그리드와 모두 사귀었던 옛 연인 데이미언(존 터투로)이 극우와 관련된 신자유주의가 초래해온 환경위기의 위험성에 대해 직접 비판한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곧 선거가 치러질 나라(미국)에 그 메시지를 전하는 게 중요했다”고 최근 인디와이어 인터뷰에서 밝혔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그녀에게’(2002) ‘나쁜 교육’(2004) 등에서 사랑과 욕망, 종교의 모순을 강렬한 원색에 담아 포스트 모더니즘 대표 감독으로 손꼽힌 알모도바르 특유의 색채는 이번 영화에도 살아 숨 쉰다. 마사의 적막한 죽음 뒤에 홀연히 등장하는 미셸(틸다 스윈튼이 1인 2역을 했다)의 존재는 원작에 없던 장면. “죽음은 절대적 끝이 아니”라는 감독의 믿음을 담았다.

美독립스타,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 풍자 '아노라'


영화 '아노라'로 스타덤에 오른 아노라(가운데) 역 미키 매디슨은 극중 스트리퍼 역할을 위해 촬영 전 실제 섹스산업 종사자(회고록 『모던 호어(Modern Whore)』저자 안드레아 워훈)의 자문을 받고 스트립 클럽을 관찰하며 ‘아노라’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지난 5월 칸 영화제에서 '아노라'는 “‘귀여운 여인’을 디즈니 가족영화처럼 보이게 만드는 반항적인 섹스 코미디”(가디언)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독립영화 감독 션 베이커(53)와 중고 신인 미키 매디슨(25)이 자유분방한 독립영화의 저력을 제대로 입증했다. 아이폰으로 90분짜리 영화 ‘탠저린’을 찍기도 했던 베이커 감독이 1970년대 뉴할리우드·이탈리아·스페인·일본 영화에 영향받은 감수성을 35㎜ 필름에 새겨냈다. 하지만 시대 감각은 동시대 뉴욕을 정조준했다.
뉴욕 브루클린에 사는 우즈베키스탄계 이민자 집안의 스트리퍼 아노라(미키 매디슨)는 클럽을 찾은 철없는 러시아 재벌 2세 이반(마크 아이델슈타인)과 불같은 사랑에 빠져 충동적으로 결혼한다. 행복도 잠시, 백마 탄 왕자인 줄 알았던 이반은 부모가 결혼 무효를 종용하자 도망치고, 아노라는 굴욕을 무릅쓰고 결혼 주도권을 건 싸움을 시작한다.
코미디와 스릴러 장르의 변주를 통해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가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후기 자본주의 체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뾰족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각본‧편집‧캐스팅을 겸한 베이커 감독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과거, 현재, 미래의 성 노동자에게 바친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션 베이커 감독이 지난 5월 25일(현지 시간) 프랑스 제77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아노라'로 황금종려상을 받고 환호하는 모습이다. EPA=연합뉴스
가난, 약물 중독 등 밑바닥 삶을 겪은 그는 성매매 트랜스젠더(‘탠저린’), 성매매로 6살 딸을 먹여 살리는 싱글맘(‘플로리다 프로젝트’), 새 삶을 꿈꾸는 포르노 스타(‘레드로켓’) 등 생계형 섹스산업 종사자들을 따뜻하고 유쾌한 시선으로 다뤄왔다. 최소한의 스태프로 실제 거리 행인들 속에서 촬영하며 생생한 시대 풍광을 담는 방식은 ‘아노라’에서도 빛을 발한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의 찰스 맨슨 추종자 역에 이어 ‘아노라’에서 스트립 클럽을 사전 답사하며 열연을 펼친 주연 매디슨도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린 공신이다.

내년 오스카 예측 '아노라' 우세…1월 후보 발표


내년도 오스카 예측에선 ‘아노라’가 우세한 상황이다. 시상식 수상 예측 사이트 골든더비, 할리우드리포터‧버라이어티 등 현지 외신에 따르면 ‘아노라’는 작품‧감독‧각본‧편집‧여우주연상(미키 매디슨) 등 주요 부문 수상 가능성이 점쳐진다. ‘룸 넥스트 도어’는 작품‧각색상과 함께 틸다 스윈튼의 여우주연상 후보 진출이 거론된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는 내년 1월 발표될 예정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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