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산 없는 싸움인데 왜 덤빌까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보는 경영’]

2024. 10. 19.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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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일본의 개항과 한국의 신미양요
소모적 지구전을 피해, 국력을 비축한 일본은 빠르게 개항에 성공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열강의 식민지화를 피하고 강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매경DB)
1853년 7월 미국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은 4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일본 우라가(浦賀) 해안에 접근, 미국과 일본의 외교 관계를 요구했다. 당시 일본은 생각할 시간을 1년 달라고 했고 페리 제독은 동의했다. 그러나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인 1854년 2월 다시 10척의 군함을 이끌고 일본에 와서 개국을 강하게 요구했고 결국 일본 정부는 이런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1854년 3월 미국에 일본 항구를 개방하는 미일화친조약을 맺게 된다.

그로부터 17년 뒤인 1871년 6월 미국 군함 5척은 조선의 강화도 지역에 접근해 조선이 개항을 하고 미국과 통상을 할 것을 요구한다. 조선 정부는 이를 거절했고 650명으로 구성된 미군과 항전 태세를 갖춘다. 그래서 벌어지는 전투가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전투 결과는 조선의 비참한 패배다. 조선은 충청도 병마절도사까지 역임했던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340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반면 미군의 전사자는 3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군의 굳건한 항전 의지를 확인한 미군은 조선과의 통상을 포기하고 철수한다.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와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모두 쇄국 정책을 선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바로 미국 군함의 위세에 눌려 개항을 결정해버린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에 비해, 흥선대원군의 지휘하의 조선은 항전 의지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일본은 서둘러 개항을 함으로써 서양의 문물을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가장 먼저 받아들이게 됐고, 조선은 서양 문물을 배척하는 쇄국 정책을 계속하다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됐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발적으로 물러선 일본 막부

개혁 세력에 패배 예측한 합리적 선택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이것뿐이 아니었다. 서양 문물이 일본에 들어오며 일본 개혁파들은 개혁에 소극적인 도쿠가와 막부를 해체하고 다시 천황이 다스리는 정치 체제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당시 개혁파들은 서양의 군사 무기를 받아들여 전투력이 강했다. 하지만 일본의 대다수 지역은 아직 도쿠가와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이 두 세력이 전쟁을 벌일 경우 그 향방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막부의 최고 책임자는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였다. 도쿠가와 막부와 개혁파 사이에서 몇 번의 전투가 있었고, 서양의 무기로 무장한 개혁파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막부도 충분히 전투력이 있었던 상황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스스로 막부를 해체하고 모든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준다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시행했다. 그 결과 천황 주도 아래 일본이 서양식 문물을 받아들이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1868년부터 시작될 수 있었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이후에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개혁파들에게 양보의 양보를 거듭해 개혁파들이 동경을 공격했을 때도 동경을 수비하며 오랫동안 전투를 벌이지 않고 바로 항복하고 개혁파 군대가 동경에 무혈입성하게 허락했다. 이후 스스로 모든 권한을 내려놨는데 그 결과 기존의 도쿠가와 막부 체제에서 새로운 서양식 메이지 유신 체제로의 이행이 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롭게 이뤄졌다. 아마도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 군함의 군사적 능력을 정확히 판단해서 싸워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개항을 했을 것이다. 서양 무기로 무장한 개혁파의 군대들과 한동안 싸울 수는 있지만 결국 막부군이 패배할 확률이 높다는 계산 아래 희생을 최소화한다는 합리적인 선택에서 항복했을 것이다.

소모적 지구전, 왜 일어날까

승산 없어 보여도 때론 개인 이익엔 부합

경제학적인 분석을 적용해보면, 이런 상황들은 ‘소모적 지구전(war of attrition)’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미국 군함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조선이나 일본을 굴복시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에서 지구전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전투를 하려면 양측에 막대한 인명과 경제력이 소모된다는 측면에서 소모전이다.

A와 B가 소모적 지구전에서 오랜 기간 전투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결국 A가 이길 확률이 100%고 B가 이길 확률은 0%라면 전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B가 항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100%와 0%의 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A가 이길 확률이 70%고 B가 이길 확률이 30%라는 식의 상황이 대부분이다.

당신이라면 5년간 싸워 승률이 30%인 전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문제는 인류의 역사에는 약한 다윗이 누가 봐도 훨씬 강한 골리앗을 이기는 경우들이 가끔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 해전에서 12척의 배로 왜군 함선 133척을 물리친 적이 있고, 베트남은 세계 최강의 미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냉철한 경제학자들이 전쟁의 지휘관이라면 30% 승률의 전쟁은 절대로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바로 항복할 것이다. 이런 경제학자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이유도 존재한다. 전쟁이란 이기든 지든 결국 양쪽에 큰 희생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전쟁 없이 승패를 가리는 것이 국가와 민족의 측면에서는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미 설명한 일본 근대화 과정도 도쿠가와 요시노부 스스로의 정권 반납과 동경 지역 반납이라는 행동으로 국가적인 피해를 최소화하고 외세 개입도 막으면서 일본이 서양식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경제학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또한 국가와 민족에게는 전쟁 없이 승패를 가르는 것이 좋겠지만, 개인 측면에서는 지더라도 끝까지 싸우는 것이 오히려 이득인 경우가 많다.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패배자와 격렬한 전투 끝에 아직 일정한 세력을 지닌 패배자에 대한 승자의 대우가 다른 경우가 현실에는 많아서다.

만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개혁파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면 그래서 패배해서 어쩔 수 없이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줬다면 어땠을까?

개혁파라고 해도 도쿠가와 막부를 위해 끝까지 싸우던 모든 막부 측 군인들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막부 측 세력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권력의 한자리를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전투도 없이 스스로 수백 년 이어온 막부를 다시 천황에게 넘김으로써 막부 충성파들은 더 이상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따르지 않게 됐다. 그래서 외톨이가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유신의 결과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국가나 민족도 중요하지만 개인으로서는 자기 자신도 중요한 것이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것인지 아니면 길고 짧은 것을 겨뤄보고 결판을 내기 위해서 불리한 상황이라도 역전을 노리고 끝까지 전투를 벌일 것인지는 경제학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 철학의 문제일 수 있다.

경제학적으로는 50% 미만의 승률이라면 절대로 소모적인 지구전을 피하고 항복 선언을 해야 하지만, 결국 유한한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처참하게 패배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역전의 희망을 품고 싸워보는 것도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1호 (2024.10.23~2024.10.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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