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두고도 매음굴 돌아다닌 ‘우울한 청년’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2024. 10. 19.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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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하루, 욕망이 다시 얼굴을 들이민다. 살갗을 만지고, 따스한 숨결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는 홀연히, 또 늘상 사내를 찾아왔다. 매춘부의 집을 찾은 그가 물었다. “여자가 있습니까.” “하나 남은 여자가 있는데 나이가 조금….” 남자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누구라도 좋습니다.”

감정이 휘발된, 기계적 육체의 몸놀림만 가득했다. 눈을 맞추거나 애정 어린 손길은 없었다. 본능에 충실한 움직임, 침대에서 울리는 삐그덕 소리. 이내 남자는 한숨을 깊게 내쉬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괜한 짓이었군. 더러운 기분만 가득해.”

충족된 욕망은 도르래처럼 허무를 길어 올렸다. 잠깐의 욕구를 이기지 못해 돈을 주고 나이 든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죄책감. 하지만 괴로움이라는 감정은 유효기간이 짧기 마련이고 며칠만 지나면 어느덧 육체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그의 발걸음은 다시 매춘부의 집을 향한다.

욕망·허무, 그리고 죄책감을 시계추처럼 오간 이 남자의 이름은 프란츠 카프카다. 불합리한 세상과 그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개인을 그려낸 작가. 기존 권선징악 서사 구조를 부수고 내면의 어두움을 그린, 20세기를 대표하는 대문호다. 지금까지도 문학적 영토를 넓힌 기념비적 작품이나 작가에는 언제나 카프카의 이름이 따라붙는다.

올해는 그가 타계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는 ‘한국의 카프카’로 호명되기도 했다. 카프카를 애써 다시 보려는 이유다.

일러스트 : 강유나
거칠고 엄한 아버지…억압된 카프카의 욕망

소심하고 얌전한 소년…매음굴로 향하다

“사내새끼가, 우물쭈물 뭐 하는 거냐.”

카프카 가족은 체코 프라하에 터를 잡은 유대인 집안.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건 고된 일이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은 억세고 거친 사나이어야만 했다. 타향에서 여섯 식솔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큰 덩치에 권위적인 인물이었던 헤르만은 아들 카프카가 썩 맘에 들지 않다. 식탁에서는 깨작깨작, 묻는 소리에는 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소심하고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아들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소리를 질렀고 상처주는 말을 쏟아냈다. 아버지는 공포와 혐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카프카의 욕망은 늘 가족에 의해 부정당했다. 성적인 억압도 따랐다. 소녀를 만나 미소를 짓기만 해도 아버지는 언제나 엄한 표정이었다. 사랑이 필요한 나이, 성적·정서적 결핍은 그 생채기를 진하게 남긴다. 작은 일에 전전긍긍하고, 모든 일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자기 비하적인 성격이 자리 잡았다. 문학, 미술, 독서 활동만이 그의 낙이었다. 1907년 대학을 졸업한 카프카는 노동자 재해 보험 연구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잘리고 사지가 절단된 노동자에게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하는, 끔찍한 장면을 매일같이 목도해야 하는 일이었다. 세상이라는 도끼가 인간의 신체에 남긴 상흔을 기록하는 고역이기도 했다.

그는 자주 매음굴로 향했다. 돈만 내면 누구에게나 몸을 내어주던 곳. 감정의 교류 없이 쾌락을 느낄 수 있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적 억압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에게 자괴감을 남겼지만,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올 때면 그는 또다시 매춘에 몸을 기댔다.

연애 중에도 소설엔 자기 비하와 두려움뿐

스스로 기생충, 쓸모없는 사람으로 본 ‘벌레’

“내 사촌 동생 만나보겠어?”

어느 날, 둘도 없는 친구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를 불렀다. 그곳에는 그의 사촌 동생 펠리체 바우어가 있었다. 주걱턱에 다소 앙상한 얼굴이 강인한 인상을 남겼지만 그는 어찌 된 일인지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매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녀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격렬한 감정은 언제나 문학이라는 불꽃을 피우는 장작이다.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와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소송’ ‘변신’ ‘아메리카’ 등이 이때 쓰여진 책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저작은 예상과는 달리 자기혐오와 비하 그리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해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변신’만 해도 그렇다. 카프카는 자신을 기생충으로, 쓸모없는 사람으로, 사회의 갈고리에 가까스로 매달린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사회를 향해 돌팔매질을 할 배포 따위도 없다. 그는 사회가 누르는 압에 그저 질식하며 신음하는 존재였다.

아버지의 윽박지름에 순응해온 카프카는 그의 문학조차 무채색으로 칠했다. 가장 찬란해야 할 사랑조차도 채도가 낮았다. 펠리체 바우어와 5년 동안 만나면서도 그는 약혼과 파혼을 반복했다. 사랑하는 여인과 나신(裸身)으로 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환희와 벅참이 자리하지 않았다. 욕망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별, 관계의 파멸을 먼저 떠올리며 불안해했다. 그가 펠리체와 연인 관계에 있으면서도, 매춘부를 찾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감정의 전기가 일절 통하지 않는 부전도체적인 관계 속에서만 그는 욕망을 풀 수 있었다. 작품 속 섹슈얼리티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한 배경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연인 펠리체 바우어와 함께 찍은 사진. 카프카는 연인이 있음에도 사창가를 전전하는 생활을 했다.
자기혐오 끝판왕…‘분서’를 원한 카프카

올해 타계 100주기…요청 외면한 친구 덕에 빛 봐

“다 태워버리게.”

1924년 40세 나이, 폐결핵으로 요절한 그는 죽을 때조차 ‘자기혐오’로 가득했다. 죽음을 직감했을 때 영혼의 단짝 막스 브로트를 불렀다. “사랑하는 막스,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일기, 원고, 편지, 스케치. 제가 남긴 모든 것을 읽지 말고 불태워주십시오.” 자신의 책을 분서(焚書)해달라는 친구의 마지막 부탁. 막스 브로트는 외면했다. 그 때문에 카프카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책은 내면의 세상을 깨는 도끼여야만 해.”

카프카는 언젠가 이야기했다. 책이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 도구라는 뜻에서가 아니었다. 내면 깊숙한 빙벽(氷壁)에서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감정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카프카라는 도끼가 있었기에 우리는 이제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 혼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불러온 끔찍한 상흔(그의 두 여동생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이후, 카프카는 이론의 여지없는 세계적 대문호였다. 유대인 학살, 냉전, 잇따른 전쟁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했나. 벌레가 돼버린 그레고르 잠자와 우리는 얼마나 달랐나.

그가 죽은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올해, 대한민국은 ‘한강’이라는 ‘도끼’를 갖게 됐다. 소외받은 자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지만, 주제는 서슬 퍼런 쇠붙이다. 세계 문학계가 그녀를 ‘한국의 카프카’라고 호명하는 배경이다. 그가 깨어 부순 빙벽은 온화한 문학의 바다를 만들 것이다. 우리는 그 속을 유영하며 인간의 존재를 사유하게 될 테다. 문학의 시대가 다시금 다가오고 있다.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1호 (2024.10.23~2024.10.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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