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고르디우스의 매듭

양민철 2024. 10. 19.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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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철 경제부 기자


요즘 국회엔 배달앱 수수료 인하를 위해 의원실을 찾는 소상공인·자영업자 단체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정부가 지난 7월부터 주재하는 ‘배달 플랫폼(앱)-입점업체 상생협의체’에서 수수료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정치권 문을 두드리는 발길이 늘어난 것이다.

과거에도 소상공인들은 생계가 얽힌 사안이 생기면 국회를 찾곤 했다. 최근 들어 달라진 점은 ‘배달 오토바이’가 온다는 점이다. 그간 소상공인 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장사가 되는 축’이라 차를 타고 왔는데, 요즘엔 따로 배달을 뛰며 수입을 충당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사장들이 직접 오고 있어서다. 한 야당 의원실 관계자는 “예전엔 국회 내 주차 차량 등록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며 “요새는 배달하러 가야 한다며 휙 나가는 사장님이 많다”고 말했다.

자영업 문제는 배달앱 수수료 하나에만 국한된 사안이 아니다. 내수침체와 인구감소, 산업구조 변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난제다. 통계청이 매달 발표하는 고용동향 브리핑에서 요새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바로 자동화와 무인화다. 자동화·무인화 증가로 소매업이나 음식점업, 서비스업 일자리가 점차 줄어들고 있어서다.

이러면 인건비가 줄어 음식점주 이익이 더 늘어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고 한다. 돈을 아끼려고 기계를 쓰는 것보다 사람 뽑기가 어려워 무인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테이블 주문 기기나 예약 앱으로 아낀 인건비와 기기 사용료, 각종 수수료로 떼어가는 금액을 비교하면 별 차이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시급을 올리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 결국 선택지는 외국인근로자 아니면 무인 기계만 남는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층(15~29세) 취업자는 줄고 구직 포기자는 늘어나는 현상이 고착화하고 있다. 지난달 청년층 취업자가 16만8000명 줄어드는 사이 구직활동조차 하지 않는 ‘쉬었음’ 청년층도 44만2000명으로 역대 최고치로 치솟았다.

이런 구조적 난제는 기존의 접근 방식으로는 풀기도 어렵고 실제로 잘 풀리지도 않는다고 한다. 과거처럼 기준금리를 조절하거나 정부가 재정을 쏟아내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단계를 넘어선 지 오래라는 것이다. 수출이 잘되는데도 내수로 온기가 퍼지지 않는 ‘엇박자 현상’이 대표적이다. 수출이 살아나면 생산과 투자가 늘면서 고용과 소득이 증가하는 선순환이 일어나야 하는데 이런 고리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정부도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말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회동은 이런 난제를 마주한 통화·재정 당국의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칼로 잘라야 풀릴 정도로 복잡한 매듭을 의미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만남 주제로 한 것부터 거시경제의 양축을 이끄는 두 기관의 다급한 심정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과거 ‘재경부 남대문 출장소’ ‘재경부 금리국’이란 오명에 기재부와 거리를 두던 한은 현직 수장이 최초로 기재부를 방문하고, 최 부총리가 “한은이 앞바퀴고, 기재부가 뒷바퀴”라고 추켜세우는 모습은 상징적 단면으로 꼽힌다. 한 정부 관계자는 “통화정책이든 재정정책이든 ‘약발’이 먹히던 시절에나 서로 주도권을 갖겠다며 싸우는 것”이라며 “구조적 문제가 첩첩산중으로 쌓여 있는 상황에서 철 지난 이야기”라고 했다.

소상공인과 배달앱 업계의 갈등은 그나마 범위가 좁은 자영업자 문제 하나도 얼마나 풀기 어려운지 보여준다. 현재 배달 가격의 9.8%인 중개 수수료를 낮추는 문제를 놓고 공정거래위원회와 기재부 등 4개 부처가 달려들었고 교수 등 외부 위원까지 참여해 석 달째 격주마다 회의를 벌였지만 ‘상생’ 대신 입장차만 확인하고 있다. 배달 수수료율을 법으로 규제하자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지금 당장 문 닫을 위기에 처한 소상공인을 위해 뚝딱 법을 만들어낼 수도 없는 처지다. 대안으로 어려운 상인을 대상으로 배달 수수료를 조금 깎아주는 ‘차등 수수료율’ 제도가 거론되지만 이것만으로 자영업자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풀지 못하는 매듭은 결국 잘라야 한다. 저출생·고령화, 지역 불균형과 연금고갈, 노인빈곤, 소득·자산 불평등 등 갖가지 구조적 난제를 지금이라도 손대야 한다. 국회를 찾는 배달 오토바이마저 뜸해질 때는 자를 매듭조차 사라져 있을지 모른다.

양민철 경제부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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