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사표 내고, 영암의 '등대지기'가 되다
전국 지역에서는 청년들이 일군 임팩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희망제작소가 이들을 '소셜디자이너'라고 호명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성장이 로컬의 변화로 이어지는 소셜디자이너들의 다채로운 활동과 이야기를 특집으로 전합니다. 오는 11월 14일 개최되는 청년 소셜디자이너를 위한 무대 '2024 사회적가치 투자(Social Investor Relations, SIR) 대회'에서도 생생한 임팩트 경험담이 펼쳐집니다. <기자말>
[희망제작소]
월출산은 깊고 청정한 숲과 남생이가 사는 맑은 계곡을 품은, 영암군의 보물 1호입니다. 숲속 고요한 산사에서 지난 10월 12일 '숲숲영화제'가 시작됐습니다. 영암군에서 처음 열리는 환경영화제 소식에 며칠째 동네가 웅성웅성하더니, 개막작인 <내일> 상영회엔 남녀노소 관객들이 북적였어요. 영화제를 주최한 숲숲협동조합(아래 숲숲)이 <내일>을 개막작으로 고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후변화가 월출산 남생이의 생태·환경뿐 아니라 영암 주민의 생계인 농업·어업과 밀접하고, 작년에 문을 연 영암태양광발전소와도 관련 깊은 일상의 문제임을 알려주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2월 문을 연 숲숲은 서울살이를 하던 영암 출신 청년 세 명이 고향에 돌아와 각자 생업을 하다 함께 만든 법인이에요. 세 청년 모두 N잡러인데, 토목공학을 전공한 하준호 숲숲 부이사장은 건축업을 하면서 환경단체와 청년협의체 활동을 하고, 조경학을 전공한 정서진 이사장은 5천 평 규모의 생태정원을 가꾸며 환경 교육·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또 다른 멤버인 김여송씨는 에코뮤지엄을 표방하는 영암곤충박물관의 부관장입니다.
▲ 하준호 숲숲협동조합 부이사장 |
ⓒ 희망제작소 |
"매일 야근을 하니까 숲숲 사무실이 한밤중까지 환하잖아요. 근처가 논밭이고 숲이라 밤이면 캄캄한데, 2층에 있는 숲숲 사무실만 환하니까 정말 등대 같아요. 게임회사들을 '판교의 등대'라고 부르던 게 생각나서 그렇게 표현한 건데, 저는 자발적인 야근이라는 게 좀 다르네요."
-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서울서 큰 건설회사에 취직도 했는데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대학 다닐 때 건설회사 인턴을 하다가 적성에 안 맞는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전국의 건설현장을 떠돌아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게 막막하더라고요. 저는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도모하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래도 전공을 살려서 대기업에 취직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건설회사에 입사했는데 하필 첫 발령지가 동계올림픽 개최를 앞둔 평창이었어요.
▲ 하준호 숲숲협동조합 부이사장 |
ⓒ 희망제작소 |
- 부모님이 나무라지 않으시던가요.
"미친놈이라고 하셨죠, 하하. 서진이(정서진 이사장, ㈜새실 대표)는 부모님 도움 없이 이렇게 반듯하게 사업을 잘하는데도 고향 어르신들이 아직도 '서울 가서 성공해야지 여기서 뭐 하느냐'고 잔소리를 하신다는데, 저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별 계획 없이 돌아왔으니 얼마나 눈총받고 푸대접을 받았겠어요. (웃음)
▲ 숲숲협동조합이 진행한 생태투어 참가자들의 모습 |
ⓒ 숲숲협동조합 |
"환경문제에 관심 있는 친구들끼리 자주 만나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언젠가 영암군에서 환경영화제를 열고 싶다고 말했고 다른 친구는 영암에 한번 오면 쏙 빠지게 만들 수 있는 영암 생태투어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하고, 축제를 기획하면 어떨까 같이 상상도 해보고… 그런 일을 하기엔 사람이 너무 없다, 우리 같은 친구들이 더 많으면 진짜로 해볼 수도 있을 텐데, 하며 투덜거리기도 했죠. 그러다 우리끼리라도 시작해보자고 만든 게 숲숲이에요."
- 숲숲이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을 시작한 이유가 그거군요. '우리 같은 친구들'을 더 많이 모으고 싶었다면서요.
▲ 숲숲영화제 개막식 현장 |
ⓒ 숲숲협동조합 |
- 지난 7월에 '달빛포레스트 환경포럼'을 열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들었어요.
"농촌마을 작은 공간에 1박2일간 37명이 모였어요. 지역과 청년의 시각으로 기후와 환경 문제를 바라보면 무엇이 다를까. 청년들이 실천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이런 주제로 열정적인 토론이 이루어졌어요. 이튿날은 월출산과 도갑사 계곡을 산책하는 생태환경 투어를 했고요.
▲ 숲숲협동조합이 진행한 달빛 포레스트 포럼 |
ⓒ 숲숲협동조합 |
"개막작과 폐막작을 숲 속에서, 자연에서 즐기는 영화제라는 게 우선 매력이고요. 또 영화제를 보러 타지에서 찾아오는 청년들과 관광객들은 물론, 영암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환경문제가 내 일상의 문제라는 걸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게 숲숲영화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영암군이 태양광균형발전에너지사업을 추진 중이거든요. 영암에 태양광발전을 확대하고 그 수익이 주민들에게 돌아가게끔 하는 사업인데, 기후위기 시대에 재생에너지를 생산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영농형 태양광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농지가 온통 태양광패널로 뒤덮이면 어쩌나 걱정도 돼죠. 청년들을 미래세대라고 하잖아요. 청년의 시각으로 환경 현안을 바라보면 어르신들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고, 그런 차이를 좁혀가면서 균형을 맞춰나가는 게 중요하잖아요. 숲숲영화제가 그런 교육과 공론의 장이 되면 좋겠어요."
- 숲숲의 비전은 뭔가요. 앞으로 계획은요.
"내년에도 숲숲영화제를 여는 거? (웃음) 숲숲영화제가 청년의 시각에서 지역과 환경문제를 다룬 다양하고 풍성한 영화로 가득해지는 날이 왔으면 해요. 생태환경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영암에 몰려와서 토론하고 영화 찍으며 머물렀으면 좋겠어요.
저는 서진이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눌러 앉아 일거리를 만들었어요. 서울에서, 목포에서, 영암에 돌아오고 싶은 친구들이 있을 거예요. 내년에 올지 후년에 올지 더 나이 들어서 올지 모르지만요. 그 친구들에게 의지가 될 수 있도록 숲숲에서 불을 환하게 켜놓으려고요. 등대처럼, 멀리서도 잘 보이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희망제작소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글: 이미경 희망제작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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