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변해도, 흔들리지 않을 ‘그날이 오면’의 역할 [공간을 기억하다]

장수정 2024. 10. 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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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지기의 이야기⑬] 서울 신림동 그날이 오면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서울대 앞 지키는, 학생들의 공간 ‘그날이 오면’

서울대 앞 고시촌에 자리 잡은 ‘그날이 오면’은 이제는 거의 남지 않은 ‘인문사회과학 전문 서점’이다. 1988년부터 36년째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서점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대 학생들의 ‘사랑방’이었다. 당시에만 해도 서울대 학생들이 모여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시위에 나서는 학생들의 짐 보관소가 되기도 하면서 ‘없어서는 안 될’ 장소가 됐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쪽지를 붙여 소통하는 ‘만남의 장’이 되기도 했던 ‘그날이 오면’은 서울대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공간이었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1993년 이 서점을 인수해 지금까지 운영 중인 김동운 대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서점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날이 오면’의 가치를 이어나가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보기 좋은 인테리어로 독자들을 이끄는 ‘요즘’ 서점과는 결이 다르지만, 인문사회과학 서적들로 빼곡한 ‘그날이 오면’의 색깔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학생운동의 퇴조와 인문사회과학을 향한 떨어진 관심, 그리고 동네서점들의 위기까지. 김 대표는 서점을 운영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지금도, 단순한 서점이 아닌 우리 사회에 인문사회과학의 가치를 전하고, 나아가 참여를 돕는 ‘그날이 오면’의 의미를 지키고자 했다.

김 대표는 “지금은 변화 속에서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아주 소수가 관심을 두는 곳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인문사회과학을 계속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주된 이용자가 되고 있다. 서점의 정체성과는 다르지만, 지역 내에 오래 머무른 만큼 이곳을 찾아주는 지역 주민들도 있다. 주변의 학교나 도서관에 책을 유통하며 수익을 내기도 한다. 인문사회과학 전문 서점이라는 정체성은 지금도 확고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점의 외연은 더욱 확장됐다고 여긴다”라고 지금의 ‘그날이 오면’을 설명했다.

◆ 꺾이지 않을 ‘인문사회과학’의 가치

과거에도 서울대 학생들은 물론, 고시생들도 ‘그날이 오면’을 찾아 고시 관련 책을 주문하거나 원하는 책을 구매하곤 했다.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독자들부터 고시생과 지역 주민들까지. ‘그날이 오면’의 문턱은 결코 높지 않다. 김 대표는 그 이유에 대해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인문사회과학적 소양은 필수”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런 것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흔히 말하는 ‘법 기술자’가 될 수 있다. 인간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토대를 갖추기 위해선 인문사회과학은 필수”라고 설명했다.

‘그날이 오면’이 그간 지켜 온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점점 사라지고, 혹은 여성 또는 환경 문제로 범위를 넓혀 젊은 층을 겨냥하기도 하지만, 김 대표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리고 그것이 곧 ‘그날이 오면’의 원동력이었다.

지난 2006년 서점 단골들이 모여 결성된 후원회가 지금까지도 ‘그날이 오면’에 도움을 주는 등 ‘그날이 오면’이 이어가는 ‘의미’에 응원을 보내는 이들이 곧 서점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김 대표는 “지금은 서점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이 서점을 그렇게 이용할 때 이곳이 어떤 공간이었는지를 너무 잘 아는 것이다. 그 공간이 후배들에게도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결성이 됐다. 이 곳이 어떤 공간이었는지를 너무 잘 알고, 그래서 그 공간이 계속 후배들에게도 똑같이 이어지기를 바랐던 마음이다. 서점을 계속 지킬 수 있었던,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그날이 오면’을 가득 채운 서적들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면, 사람을 비롯한 모든 지구의 생명체들이 좀 더 행복하고 더 편안하게, 또 더 평화롭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더 나은 사회 속에서 더 높은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자신의 양심에 입각해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책들을 선보이고자 한다. 지금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정치적, 사회적 실천을 하는 데 있어서 좀 더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는, 그러한 기본 인식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금 많은 독자들이 이러한 가치에 다시 눈을 돌리는 그날, ‘그날이 오면’이 중심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믿고 있었다. 그는 “그날이 오면은 영리 업체가 아니라 모두의 공간이었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다시 그런 날이 왔을 때 그날이 오면이 그때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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