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원 아니면 새로울 것 없는 '전, 란', 왜 개막작이어야 했나
[김성호 기자]
영화제 개막작은 해당 영화제의 지향과 현재를 동시에 보여준다. 지향이란 관객과 처음 만나는 주목 받는 자리에서 선보일 작품을 고르는 기준을 드러내기 때문이고, 현재는 고를 수 있는 작품 가운데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영화제 전체 기간 가운데 가장 많이 조명되는 자리에 형편없는 작품을 내고픈 조직위와 프로그래머는 없다. 고르고 고른 끝에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 그것이 영화제의 지향이고 현재이며 실력이자 취향이 되는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영화제다. 여기서 한국이라 하는 것이 겸양의 표현이 될 정도로 국제적 위상 또한 대단하다. 1996년 첫 영화제가 김동호를 비롯해 이용관, 박광수, 전양준, 오석근, 김지석 등에 의해 출범할 당시엔 감히 내다보지도 못했던 성공을 오늘의 부산국제영화제가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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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전, 란> 스틸컷 |
| ⓒ 넷플릭스 |
이후 펑 샤오강의 <집결호>라거나 장동건 주연의 <굿모닝 프레지던트>, 지난해엔 장강명 소설 원작 <한국이 싫어서>까지 화제성 있는 작품들이 개막작으로 불려왔다. 어느덧 이름난 작가와 제작사가 부산국제영화제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할 정도가 됐으나, 부산국제영화제는 꾸준히 저만의 색깔이 있는 작품에 주목받을 기회를 내주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올해 개막작으로 넷플릭스 영화 <전, 란>이 선정됐을 때 논란이 인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전, 란>이 어떤 영화인가. 극장으로부터 안방으로 옮겨가는 문화, 즉 OTT 서비스의 대장격인 넷플릭스 작품이 아닌가.
뿐만 아니다. 감독이 누군가. 영화산업 내 미술작업으로 출발해 < 심야의 FM >까지 감독하긴 했으나 이렇다 할 성공작을 내놓지는 못한 김상만이다. 그런데 주연배우는 강동원, 또 곁에는 박정민과 차승원, 진선규까지 포진해 이 시대 블록버스터의 요건을 갖췄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부산국제영화제의 선택과는 차별화됐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어째서 개막작으로 <전, 란>을 택했을까. 넷플릭스를 위시한 OTT영화에 더 문호를 넓게 열기 위하여? 극장에서 OTT 서비스로의 이동이 이 시대 관객들의 주된 관람행태로 바뀌어가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기 때문에?
영화제 측은 <전, 란>이 지금까지 개막작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란 걸 인정하면서도 OTT 영화란 사실을 고려한 적 없고 그저 작품이 괜찮아서 골랐다고 전했다. 과연 그만큼 뛰어난 작품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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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전, 란> 스틸컷 |
| ⓒ 넷플릭스 |
무신집안이라 그런지 아직 뼈가 여물지 않은 어린 나이에도 교육이 엄하기 그지없다. 무술 선생과 검술대련을 매일같이 치르는데, 무관인 아버지의 눈에 들지 않으면 대뜸 회초리가 날아든다. 그런데 요상한 것이 훗날 대단한 인물이 될 종려를 때릴 수는 없는 일이라며 그의 몸종 천영을 대신 후려 패는 것이다. 천영보다 먼저 종려의 몸종이 된 이는 거품을 물고 죽어나갔다. 말하자면 쇼크사인데, 그 정도로 아이를 때려죽이는 걸 보면 아버지가 대단한 무관이긴 한 모양이다. 조선의 주요 무관들과 달리 임지를 나돌지 않는 것이 좀처럼 이해가 되진 않지만 말이다.
천성이 굳센 천영이다. 못난 종려가 잘못할 때마다 대신 얻어맞는 일에 만족할 리 없다. 상황을 봐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내달리는데, 집에는 나무에 목을 매고 죽어있는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들자식을 노비로 빼앗긴 뒤 삶을 비관한 것쯤으로 처리되는 가운데, 이야기는 천영이 종려의 몸종으로 성인이 된 뒤 겪게 되는 결코 만만치 않은 고난들을 그린다.
영화는 '전', '쟁', '반', '란', 모두 네 개의 챕터로 이뤄졌다. 신분제의 모순과 책임 있는 이들의 무능과 부패, 사회적 압력이 치솟아 마침내 터져 나올 그 시기에 전란이 일어난다. 영화는 '전'과 '란', 두 글자를 제목으로 빼어달았지만, 그 안에 '쟁'과 '반'을 감추고 있음이 역력하다. 드러난 싸움은 왜적과의 다툼, 즉 임진년과 정유년에 일어난 두 차례 왜란이다. 반면 감춰진 건 조선 사회 안의 부조리, 천대받는 백성과 착취하는 양반이 어우러진 못난 사회상이다.
왜란 가운데서 천영은 나라를 침탈한 왜적에 맞서 대활약을 거듭한다. 천영과 함께 한 이들은 의병을 꾸려 크고 작은 공을 세우지만 나라로부터 공신첩을 받지 못해 직접 왕을 알현하기로 한다. 물론 그들을 기다리는 건 무능한 데다 속 좁고 비열한 국왕이다.
천영의 반대편에선 종려가 있다. 전쟁 발발 뒤 노비들이 일으킨 하극상으로 부모와 아내, 자식까지를 모두 잃었다. 그는 천영이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오해를 품고 복수심에 불탄다. 전란 내내 왕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백성을 해한 종려다. 그러고도 공신 대접을 받으니 세상이 뒤집어진 게 아니라면 왕과 공신들이 비뚫어진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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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전, 란> 스틸컷 |
| ⓒ 넷플릭스 |
다만 영화는 강동원을 위시한 배우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점에서 실망스럽다. 우선 캐릭터며 드라마, 주제의식 등 여러 부문에서 깊이 고민한 흔적이 없다. 자식을 빼앗긴 아버지는 성질 급한 아들이 단 며칠 만에 탈출해 집에 가니 목을 매달고 죽어 있다. 아들이 살아있는데 아버지는 목숨을 스스로 내버린다. 독한 아들 천영이 자기를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또 하나 남은 피붙이를 끔찍이 대하는 평범한 아버지였다면 감히 그럴 수가 없었을 테다. 물론 그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해서 좋은 건 단 하나다. 현 시점의 천영을 쉽게 설명해낼 수 있다는 것, 그뿐이다.
천영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는 이들의 동기며 욕구 또한 얼마 드러나지 않는다. 선조를 완전무결한 지도자로 여기는 고지식한 양반이 백정이며 천민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고, 그들이 왕을 함부로 표현하는 모습 또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전란을 함께 헤쳐 왔을 이들은 또 별것 아닌 이유로 갈라져 엇갈린 운명을 나눠지게 된다. 온갖 못 볼 꼴을 다 보며 7년 전쟁의 막판까지 버텨낸 이들이 한 순간 도적떼로 돌아서기도 한다.
신분제의 부조리는 개별 캐릭터의 말로만 드러날 뿐 드라마로 보여지지 않는다. 대신 매를 맞는 천영의 에피소드 외에 다른 이들의 모습에선 그와 같은 곡절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각 인물은 백정이고 노비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겪었을 법한 그림자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양반과 노비가 마치 한 데 어우러져 살아온 양 문화적 충돌 또한 겪지 않고 무리지어 살아간다. 한두 시간 전엔 서울 시민이었을 배우들이 조선의 노비와 양반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진다. 캐릭터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배역만을 나누어 준 기색이 너무나 역력하다.
국왕 선조는 실제에 비해 너무나도 무능하고 욕심 많은 인물로만 그려진다. 더없이 인간의 심성을 잘 알고 활용한 노회한 정치꾼이 영화에선 세상 물정 모르고 권위만 세우려는 노욕의 결정체로 존재한다. 전쟁 가운데 했을, 하다못해 권력을 지키려 고심했을 나름의 고충 또한 전혀 비춰지지 않는다. 그는 그저 신분제 위에 서 있는 무능하고 파렴치한 악의 화신일 뿐이다.
영화는 온갖 부조리를 네 개의 장에 각각 나누어 넣은 것처럼 흘러가지만 실상은 서로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모아도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와중에 액션은 부실하고 오로지 푸른 옷을 차려입은 강동원의 존재만이 부각되는데, 그 사이에서 왜 조선이고 왜란이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소실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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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전, 란> 포스터 |
| ⓒ 넷플릭스 |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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