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의 판앤펀] ‘맛있는’ 내러티브가 이긴다

2024. 10. 1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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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흑백요리사’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맛이 아니었다. 어차피 시청자들은 음식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노래나 춤, 패션 등과는 달리 시청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래서 시청자 투표가 불가능한 유일한 서바이벌 쇼가 요리다. 우리는 심사위원들의 말을 통해 맛을 대리 체험할 뿐이다. 대신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쇼의 ‘내러티브’였다. 요리사와 심사위원 등 인물이 만들어내는 서사, 그리고 ‘흑백요리사’라는 쇼 전체가 획득해낸 서사.

「 성공적 내러티브는 전염성 강해
대중과 상호작용하며 변하기도
시대에 맞는 내러티브 고민해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출연 중인 에드워드 리. 뉴시스

여기서 ‘내러티브’란 낱개의 사건 혹은 에피소드들이 쌓이면서 만들어지는, 맥락과 흐름이 있는 이야기의 전개를 말한다. 캐릭터들의 말과 행동, 경험, 업적, 이미지 등이 합쳐져 빚어내는 ‘이야기의 후광 혹은 자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내러티브는 대중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 좌우하는 중요한 의사결정 기준이 된다. 공감하는 내러티브는 대중을 열광시키고, 그렇지 않은 내러티브는 힘을 잃는다. 그러므로 이런 쇼에서 내러티브는 전략적으로 풀어낸 이야기라는 뜻도 된다.

나폴리 맛피아가 최종 우승자가 되는 ‘사건’을 만들었지만, 대중들은 에드워드 리(사진)를 ‘내 마음속의 1위’로 꼽았다. 그가 이 쇼에서 만들어낸 내러티브가 더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리는 적지 않은 나이만큼 막강한 ‘스펙’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했지만, 두부 요리를 반복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여전히 신선한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가진’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여기에 ‘재미교포로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오랫동안 고민해왔다’는 감정에 깊이 닿는 스토리와 ‘그 정체성을 일관되게 요리에 반영하려고 노력한다’는 메시지가 더해졌다. 그 결과 그는 ‘평생 품었던 내면의 갈등을 아름다운 성취로 극복해냈다’는, 이 쇼에서 가장 매력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요리사 에드워드 리가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호텔 나루 서울 엠갤러리에서 열린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공적인 내러티브는 전염력이 강하다. 그것을 공유하고 전파하면서 대중들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소셜미디어에서 에드워드 리의 인생 속 에피소드를 계속 발굴해낸다. TV와 유튜브 토크쇼에서도 그의 인생과 캐릭터가 끊임없이 소개된다. 이렇게 점점 더 많은 층위를 쌓아가는 그의 내러티브는 여러 에피소드 속에서도 ‘낯선 상황에 꾸준히 도전해왔다’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그리움, 문학도로서의 경험 같은 반전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결국 그 이야기를 나누며 대중은 어떤 아름다움 혹은 삶의 작은 교훈을 얻었다고 느낀다. 이 모든 것이 성공적인 대중 내러티브의 요건이라 할 수 있다.

‘흑백요리사’가 신선한 내러티브를 완성해가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전례 없는 100명의 요리 서바이벌 쇼, 그것도 경력 차이로 계급을 나눈 설정은 쉽게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예측하게 했다. 백수저 참가자들이 초반에 하나둘 탈락하며 자극적인 대결이 쇼의 중심이 되는가 싶었지만, 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처음부터 안성재와 백종원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맞서는 모습이 부각되며, 두 전문가의 보이지 않는 대결이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안성재가 전하는 ‘음식은 셰프의 의도와 완성도를 담아야 하는 작품’이라는 무언의 메시지와, 백종원의 ‘음식은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 사이의 긴장감이 쇼의 내러티브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다. 시청자로서는 어느 쪽 편을 들기도 어려웠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그들이 뿜어내는 ‘내공’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넷플릭스의 요리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요리 계급 전쟁’의 인기가 홍콩과 대만을 휩쓸고 있다. 사진은 흑수저 셰프와 백수저 셰프가 1:1 맛 대결을 앞둔 모습. 넷플릭스

출연자들 역시 흥미로운 내러티브를 쌓아갔다. 단출한 국수 한 그릇으로 화려한 젊은 셰프를 이긴 한식 장인, 첫 경쟁에서 밀려났지만 흔쾌히 물러났던 여경래의 멋진 백수저 에피소드, 그를 이긴 배달원 출신의 ‘철가방 요리사’, 냉정한 ‘트리플 스타’, 열정적인 ‘요리하는 또라이’, 리더십의 최현석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만들어낸 스토리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하여 이 쇼는 단순한 서바이벌의 흔한 내러티브를 넘어, ‘전문가의 경지와 그에 이르는 시간 동안 쌓아 올린 노력은 아름답다’는 신선한 내러티브를 시청자들에게 각인시켰다.

가장 큰 비난을 받았던 부분은 승부의 세계에서 ‘누군가는 비정하게 남을 버려야 내가 살아남는다’는 구태의연한 서바이벌 쇼의 내러티브를 강요하려 했던 두 번째 팀 대결이었다. 서바이벌에 걸맞게 승리의 의지만 강조했던 몇몇 참가자들도 촌스러워 보였다. 결국 시청자들은 독한 승부보다는 ‘장인의 세계를 존중하고 그들을 존경하고 싶다’는 자신들의 내러티브를 쇼에서 이끌어냈다. 내러티브는 이처럼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도 하고, 대중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 맞는 내러티브는 어떤 것인지, 그를 위해 어떤 사건과 에피소드를 쌓으며 어떤 결말을 지향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흑백요리사 시즌2’를 포함한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하는 모든 분야에서 말이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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