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두 가지 애도

2024. 10. 18.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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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

국가폭력의 희생자 위로한
한강의 소설… 외로운 죽음
부끄럽게 치부되는 것 거부해

현대 동물행동학자들은 끈질긴 관찰로 코끼리들이 동료의 주검을 맴돌며 어루만지거나 발을 구르며 슬픈 감정을 표현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심지어 주검을 땅에 묻거나 백골이 된 주검을 이따금 방문해 만지면서 그리워하는 코끼리의 행동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이런 발견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들어 본 이들이라면 인간 존재의 근본을 흔들 만한 사건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장례와 애도의 권리를 두고 대립하는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이야기에서 장례 의식을 인간 존재의 ‘우월한’ 존엄성을 고취하는 의례로 은연 중에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오늘날 동물에 대한 새 지식이 인간의 지위를 격하시켰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하지만 새 지식은 친족이나 이웃의 죽음에 대한 슬픈 감정을 표현하고 공유하는 행위가 ‘사회성’을 갖춘 일부 지능 높은 동물의 특징임을 명확히 해준다는 면에서, 장례와 애도 의식이 공동체에 끼치는 중대한 사회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대학 2학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친구가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서로의 대학생활을 자랑하며 즐거워했던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충격은 컸다. 작은 빈소는 영정도 없이 이상하리만큼 텅 비어 있었다. 처음에는 유족이 조문 맞을 준비를 아직 다 하지 못한 줄 알았다. 하지만 나와 친구들은 이내 조문을 거절받았다. 친구의 오빠는 장례식은 없을 거라고, 바로 발인할 테니 돌아가 달라고 했다. 우리는 친구의 영정에 꽃 하나도 올리지 못한 채 황급히 빈소를 떠나야 했지만 차마 가족에게 더 물을 수 없어서 주차장에 숨어 함께 눈물을 흘렸다. 친구가 왜 그러한 죽음을 선택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우리는 끝내 알지 못했다. 동네에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우리는 친구를 그렇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위해 장례의 예의도 갖추지 못했던 우리는 애도의 시간도 보내지 못하게 됐다. 결국 매년 함께하는 모임에서도 그와의 추억을 꺼내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숨겨진 죽음에 그의 삶도 함께 숨겨져야 할 것으로 명령받기라도 한 것처럼!

안티고네의 오빠 폴리네이케스가 반역자라는 이유로 국가권력에 의해 장례를 금지당했다면 친구는 친권을 가진 가족에 의해 죽음을 숨겨야 할 자가 돼 장례의 예를 받지 못했다. 안티고네는 가족으로서 국가에 저항하며 오빠의 장례를 기어이 치르며 홀로 애도했지만 가족에 의해 장례되지 못한 이의 죽음에는 생전 그를 알던 이들이 애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노벨상위원회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소설가 한강을 지명하며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했다. 그는 4·3이나 5·18 같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인류사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애도의 해석학을 독자에게 열어 주었다. 공동체의 성실한 역사적 애도가 빈약한 곳에서는 가족의 애도도 충분히 피어나지 못해 그 한이 하늘에 사무치는데, 그는 문학적 애도로 희생자들의 죽음을 세상이 함께 기억할 수 있도록 유가족을 위로했다.

그러나 어떤 외로운 죽음에는 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 가족이 처음부터 애도를 포기한 곳에서는 공동체의 애도도 막혀 지인들의 슬픔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이 슬픔의 유랑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친족에 의해 부끄러운 죽음으로 숨겨져야만 했던 이들의 한을 달래는 또 다른 애도의 해석학을 기다려야 할까? 외로운 죽음이 부끄러운 죽음으로 취급받도록 하지 않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다움을 찾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한강은 그의 문제작 ‘채식주의자’에서 두 번째 애도의 해석학으로 우리를 이미 인도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무가 되고 싶었던 영혜의 고립된 죽음을 읽으며 이제 우리 사회에도 외로운 죽음들이 부끄럽게 치부되는 것을 거부하는 참된 애도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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