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지나간 여름 이야기

2024. 10. 18.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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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에 물들인 봉숭아 물이 0.3㎜도 남지 않았다.

그날도 봉숭아 물을 들이려는데, 백반이 없었다.

식초보다 농축된 빙초산이니까 봉숭아 물도 더 진하게 물들 거라고.

이면지를 깔고 톡, 봉숭아 물든 손톱을 마저 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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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손톱에 물들인 봉숭아 물이 0.3㎜도 남지 않았다. 봉숭아 물이라면 잊지 못할 사연이 있으니, 첫사랑 운운하는 낭만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여름이면 나는 앞집에 사는 은하와 봉숭아 물을 들이곤 했다. 그날도 봉숭아 물을 들이려는데, 백반이 없었다. 백반은 ‘산성’이라고 어디서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식초도 신맛이 나니까, 산성이겠거니 생각했다. 백반 대신 식초를 쓸 요량으로 부엌으로 갔다. 찬장에 식초는 없고 빙초산이 있었다. 녹색 병에 위협적인 빨간 글씨로 ‘빙초산’이라고 쓰여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코를 톡 쏘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제 딴에는 과학적인 근거를 대가며 은하에게 빙초산을 넣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식초보다 농축된 빙초산이니까 봉숭아 물도 더 진하게 물들 거라고. 은하는 살짝 미심쩍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수긍했다. 우리는 열 손가락을 실로 칭칭 감으며 약속했다. 아무리 풀고 싶어도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자고. 그날 밤, 나는 손가락이 따갑고 욱신거려 잠에서 깼다. 꽉 조여 묶은 탓인가 싶어서 실을 풀었다가 깜짝 놀랐다. 손톱 밑에 간장처럼 새까만 피가 고인 게 아닌가.

이 사달이 난 걸 알면 엄마한테 호되게 꾸중을 들을 게 뻔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고통이 앞섰다. 나는 질금질금 울면서 엄마를 깨웠다. 엄마가 부스스한 얼굴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엄마가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탄식했다. 그러고는 반짇고리와 빨간약을 내왔다. 엄마는 바로 소독한 바늘로 내 손톱 밑을 땄다. 피가 퐁글, 솟았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봐라, 죽은 피.” 잘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라는 듯 검은 피 한 방울까지 눌러 짰다. 아이의 엉뚱한 호기심이 부른 대가치고는 가혹한 통증이었다. 다음 날 엄마는 코가 땅에 닿도록 은하 엄마에게 사과해야 했다. 그때를 복기하니 싱거운 웃음이 난다. 이면지를 깔고 톡, 봉숭아 물든 손톱을 마저 깎는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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