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을 다문다” [김선걸 칼럼]
1976년 미국 워싱턴 정가가 동양의 작고 가난한 나라 ‘KOREA’ 이야기로 들끓었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등 미국 신문의 1면을 연일 장식했고 한미 정부가 정면 충돌하는 초유의 외교 갈등까지 갔다. 한국 로비스트가 미국 의원들에게 거액을 뿌려 포섭했다는 것이다. 그 주인공은 故 박동선 씨다.
박 씨는 조지타운대를 졸업하고 사교클럽을 만들어 미국 정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당시 부통령, 하원의장, 상원 원내대표 같은 거물들과 어울렸다.
지난달 그가 별세했다. 부음을 듣고 오래전 그를 몇 차례 만나 취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박 씨는 기아에 허덕이던 한국에 미국 쌀을 들여왔고, 주한미군 철수를 막는 데 기여했다. 양국의 외교 갈등으로 비화되자 면책특권을 보장받고 미국 의회에 증인으로 섰다. 그는 끝까지 한국 정부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오랜 친구’인 미국 의원들에게 개인 친분 때문에 돈을 준 것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 언론이 그를 한국의 사주를 받은 로비스트로 볼 소지는 충분했다. 행동 자체가 한국 이익을 지키는 것이었고, 과정에 지저분한 개인 비리가 없었다.
2000년대 초 그를 만났을 땐 일본·대만 정부를 도와주며 글로벌 컨설팅 사업을 도모하고 있었다. 김대중·노무현정부 ‘옷로비 사건’ 등 정치 브로커들이 논란인 시기였다. 박 씨는 스스로 민간 외교관이라 자부했다. 권력 주변을 배회하는 정치 브로커들과 비교되는 자체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들(정치 브로커)과 당신은 어떻게 다른가.”
그들을 혐오한다는 듯한 표정. 질문이 거듭되자 그는 대답했다.
“나는 입을 다문다.”
이 대답이 뇌리에 남았다.
고인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단지 박 씨의 존재감은 바로 상대방이 ‘무거운 입’을 믿기 때문이라던 말이 기억난다. 존슨 전 미국 대통령과 포드 부통령, 수십 명의 상원의원은 물론 중동의 왕자, 중남미·일본의 유력자 모두 그랬다. 박 씨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은 최근 국내의 번잡한 상황을 보면서다.
듣도 보지도 못한 정치 브로커가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친분을 자랑하며 떠든다. 자기가 입을 열면 탄핵이라거나, 서울시장을 자기가 시켰다는 황당한 얘기를 한다. 대통령실 행정관 출신 인사는 여당 대표를 비방하는 대화를 녹취당했다. 이 인물은 대통령실에 십상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대화엔 국가도 없고 국민도 없고 민생도 없다. 공공적인 느낌이나 사명감이라곤 한 줌 찾기 힘들다. 한국의 최고 권력 주변이 이처럼 저급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침묵이나 보안은커녕 친분을 팔아 자기 장사를 하는 협잡의 전형이다.
20년 가까이 본인의 공직 경험을 회고록으로 연속 집필한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을 최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사명감을 갖고 고뇌의 날들을 기록했다고 했다. 실제 미국 같은 나라에선 웬만한 고위 관료는 회고록을 쓰는 전통이 있다. 그들이 겪은 시간과 경험은 개인 것이 아니고 세금으로 형성된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맞는 얘기다. 지금 회자되는 이야기들의 문제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 주변서 나온다는 점이다. 정치 브로커들이 공적 자산을 갉아먹는 셈이다. 회고록은커녕 기록할 가치도, 기록할 수도 없는 모사뿐이니.
조국을 위해 일하고도 ‘입을 다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이 뻗어나가던 시대 얘기다.
지금은 권력을 팔아 자기 장사를 하는 브로커만 설친다. 그저 삼류 영화 같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0호 (2024.10.16~2024.10.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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