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의 시시각각] 과연 삼성만 위기인가
요즘 재계의 화두는 ‘삼성 위기론’이다. 삼성전자는 올 3분기에 9조1000억원(잠정)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적잖은 규모다. 그런데 시장 기대엔 미치지 못했다. 급기야 반도체 부문 수장(전영현 부회장)이 “송구하다”며 사과문까지 냈다. 이 자체가 삼성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말해 준다. 그런데 더 짚어볼 것이 있다.
과연 삼성만 위기인가. 삼성이 인공지능(AI) 시대 도래의 흐름을 못 읽고 AI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에서 실기한 것은 웬만큼 알려져 있다. 오히려 나는 중국의 추격에 주목한다. 삼성은 설명 자료에서 ‘중국 메모리 업체의 레거시 제품 공급 증가 영향’이란 내용을 짤막하게 붙였다. 첨단이 아닌 범용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의 공세가 삼성 실적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HBM도 문제지만 중국의 추격이 더 문제”라고 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D램 시장에서 중국 메모리업체 점유율이 올 3분기 6%에서 내년 3분기엔 10%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한다. 무서운 속도다. 이렇게 되면 10여 년간 지속된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3사의 과점 구도가 사실상 깨지게 된다. 국내 반도체엔 악몽이 될 수 있다. 중국 D램의 대표주자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신생 업체다. CXMT가 D램 판매를 선언한 게 2020년. 4년여 만에 시장 주요 플레이어로 성장했다. 여기엔 물론 중국 정부의 보조금과 내수 몰아주기 등 전폭적 지원이 있었다. 올해 중국이 쏟아붓는 반도체 기금만 3000억 위안(약 57조원)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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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업체 추격 더 거세지는데
52시간제, 의대 광풍은 여전
이대로면 제조업 전반이 위기
」
그러나 이런 상황이 삼성만의 것일까. 반도체와 함께 한국이 자랑했던 2차전지는 중국 업체에 눌리고 있다. 올해 8월까지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서 중국 업체의 점유율은 65.1%, 한국은 21.1%다. 1위 CATL(37.1%)을 비롯해 상위 10개사 중 6개사가 중국 업체다. 세계를 주름잡던 액정표시장치(LCD)는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겼다. 석유화학, 철강은 요즘 저가 중국산과의 경쟁으로 실적 암흑기를 보내고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는 그나마 미국의 중국 업체 봉쇄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혹여라도 판이 바뀌어 미국의 대중 제재가 느슨해지면 어떻게 될까.
전 부회장은 사과문에서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 복원과 조직문화 재건을 다짐했다. 기술도, 조직문화도 결국 ‘사람’에 대한 얘기다. 삼성 내부에서 직원들이 예전처럼 치열하게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온 지 꽤 됐다. 직원들 간에 “튀려고 하지 마라”는 말이 오간다는 얘기도 있다. 워라밸 중시 문화의 확산도 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경직된 ‘주 52시간제’의 파괴적 부작용을 빼놓을 수 없다. 기술 기업에서 연구개발과 문제 해결보다 퇴근시간 준수가 우선시되면 경쟁력은 뒤처지기 마련이다. 이 역시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작 근로시간 개편 논의는 멈춰서 있다. 정부는 지난해 3월 근로시간 유연화 방안이 여론 반발에 부닥친 뒤로 아예 손을 놓고 있다.
인재 확보 양상도 과거 같지 않다. 대학의 반도체학과는 의대 다음의 선택지가 됐다. 유명 대학 반도체학과는 의대 동시 합격생의 이탈로 번번이 추가합격자로 정원을 채우고 있다. 의대가 최상위권 학생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비정상은 의대 증원 확대로 더 심해질 것이다.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가장 큰 리스크는 기술 인재의 부족과 이에 따른 기술경쟁력 약화”(『히든 히어로스』)라고 강조했다. 이 또한 삼성만의 문제일 리 없다.
삼성의 위기 요소들은 한국 제조업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중국의 추격(대부분은 이미 추월), 주 52시간제, 의대 광풍은 다 알려진 것들이다. 그러나 말은 무성한데 개혁은 실행되지 않는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한 컨설팅 업체는 한국 상황을 ‘NATO(No Action, Talk Only)’라고 꼬집었다. 지금이 딱 그 꼴이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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