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계급 전쟁’ 서바이벌의 공포

장지영,문화체육부 2024. 10. 17. 00:35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미국에서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는 '댄스 마라톤'이었다.

댄스 마라톤은 상금을 놓고 가장 오랫동안 춤을 추는 커플을 뽑는 대회다.

오히려 1930년대 댄스 마라톤의 진정한 계승자는 요즘 TV나 OTT가 쏟아내는 서바이벌 예능이다.

서바이벌 예능이 내건 '계급 전쟁'은 한국 사회의 경쟁 문화가 이제 위험 수준에 달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미국에서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는 ‘댄스 마라톤’이었다. 댄스 마라톤은 상금을 놓고 가장 오랫동안 춤을 추는 커플을 뽑는 대회다. 당시 인구 5만명 넘는 도시에서 한 번 이상 개최됐을 만큼 엄청난 비즈니스였다.

규칙은 대회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참가자들은 몇 시간마다 약간 쉴 수 있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일 계속돼 참가자들이 실신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일부는 사망하기도 했다. 또한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병에 걸리거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부자 프로모터들의 배를 채우는 착취적 대회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는 줄지 않았다. 우승 상금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회가 제공하는 무료 음식과 쉴 곳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다. 또 값싸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라는 점에서 관객도 많았다. 관객은 참가자들의 극한 경쟁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댄스 마라톤 비즈니스는 사회 각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야 사라졌다. 당시 남성들의 입대로 참가자가 급감한 것이 주요인이었다.

요즘도 미국에서 댄스 마라톤이란 이름을 단 대회가 있지만, 자선행사로 하루 이틀 개최될 뿐이다. 오히려 1930년대 댄스 마라톤의 진정한 계승자는 요즘 TV나 OTT가 쏟아내는 서바이벌 예능이다. 199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된 서바이벌 예능은 한국에서 2009년 엠넷의 ‘슈퍼스타K’가 유례없는 흥행 이후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엔 대중음악 분야의 오디션이 주였으나 점차 온갖 영역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방송사들은 진행 방식과 규칙 등을 바꿔가며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바이벌 예능의 등장은 경쟁이 필수적인 현대사회에서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에서 서바이벌 예능의 유난스러운 호황은 그만큼 한국이 무한 경쟁 사회라는 방증이다. 개인적으로는 참가자의 불행과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서바이벌 예능이 잔인하게 느껴져서 잘 보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흑백요리사’를 모르면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흑백요리사’를 보며 놀랐던 것은 부제부터 ‘요리 계급 전쟁’을 내세우는 한편 방송 내내 ‘계급’이란 단어를 언급하고 있어서다.

‘흑백요리사’를 계기로 찾아보니 지난 2021년 여성 댄서들이 겨룬 엠넷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처음 ‘계급’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룹’이란 단어를 써도 됐을 것 같은데, 참가자들을 굳이 리더-세컨드-서브-어시스트 계급으로 나눴다. 이후 여러 서바이벌 예능이 자연스럽게 ‘계급’을 나누고 계급 대결을 벌였다. 최근 엠넷에서 방영 중인 ‘스테이지 파이터’의 부제도 ‘몸으로 싸우는 무용수들의 계급 전쟁’이다. 이런 서바이벌 예능에서 참가자들은 계급에 따른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시청자들에게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하든 상위 계급으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반면 스타가 탄생하는 등 나름 공정한 경쟁 같지만 이런 서바이벌 예능의 최고 수혜자는 방송사나 OTT라는 것은 간과된다.

서바이벌 예능이 내건 ‘계급 전쟁’은 한국 사회의 경쟁 문화가 이제 위험 수준에 달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동안 암묵적이었던 ‘계급’을 이제는 다들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불편하다 못해 무섭게 느껴진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할수록 실패하고 패배한 사람도 많은 법이다. 현재 우리의 모습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춰야 하는 1930년대 댄스 마라톤 참가자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jyja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