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쪽 눈 실명, 그런데 더 잘 '보는' 그림책 작가

김성호 2024. 10. 1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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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252] 미야우치 후키코, 이세 히데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김성호 기자]

그림책을 보는 이들이 있다. 말 그대로 그림이 주가 되는 책을 '보는' 이들이다. 나름의 서사가 있는 책일 수도 있겠고, 주 독자가 아이들인 동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림책이라 불리려면 무엇보다 그림이 주가 되어야 한다. 콩이든 깨든 송편이라면 속이 있어야 하고, 붕어빵엔 앙금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통상 책의 주인공이 되는 글의 패권을 스리슬쩍 밀어내고서 그 곁에 제 입지를 확고히 하는 그림책이라니 놀라운 균형이 아닌가 말이다.

활자 중심의 책이 읽는 것이라면 그림책은 보는 것이다. 사진책과 함께 그림책만이 오롯이 읽는다는 말보다 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그 주고받음의 조화를 생각하며 만들어가는 그림책은 하나의 장르라 보아도 틀리지 않다.

그림책에서 그림은 활자의 보조적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 주된 역할을 해낼 때가 많다. 그림이 보는 이의 이해를 돕는 수단으로 효용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도 훌륭한 표현물이자 예술적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그림이 어른들에게 그대로의 가치가 있다면 그림책 또한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의 일환으로 치부될 수는 없겠다.

그 효용 때문일까. 오늘날 서점가에는 그림책을 즐기는 이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전자책이 대체할 수 없는 그림책만의 매력, 책장을 넘기며 짧은 글을 읽고 오래도록 그림을 감상하는 일의 가치를 누군가는 알고 있는 것이겠다.

30대 나이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책 표지
ⓒ 천개의바람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는 그림책 시장에선 제법 성공한 저작이다.

동화 뿐 아니라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양질의 그림책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는 출판사 '천개의바람'이 좋은 그림책을 선정해 내놓고 있는 바람그림책 시리즈로 한국에 출간됐다. 전국학교도서관사서협회가 추천한 책에 선정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아 그림책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폭넓게 읽혔다.

저자는 미야우치 후키코, 그림은 이세 히데코가 그렸다. 특히 그림을 그린 이세 히데코를 주목할 만하다. 1949년생으로 어느덧 노년에 접어든 그녀는 한국에서도 적잖은 팬을 보유한 유명 작가다. 지난해엔 부산에서 그림 전시와 함께 성황리에 북토크를 열었을 정도다. 동화 삽화를 그리던 초기 시절로부터 직접 글을 쓰고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며 작품 세계를 꾸준히 넓혀왔다.

특히 작가가 서른여덟, 비교적 이른 나이에 안구질환을 겪고 망막박리 수술을 겪은 뒤 작품세계가 크게 변화하고 성장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전까지 눈에 비치는 모습 그대로를 평이하게 그렸다면, 삶의 이면 인간 내면을 비추는 요소에 집중해 그를 시각화하는 작업이 중심이 됐다.

여전히 안구 질환으로 고통 받고 오른 눈의 시력까지 완전히 잃었지만, 작품활동은 멈추지 않고 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된 뒤 프랑스 파리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원화전을 열고 팬들과 만나기도 한다. 그의 작품 세계가 한껏 발현된 그림책이 한국에도 여럿 출간되었는데,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도 빼놓을 수 없는 저작 중 하나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는 평이한 책이 아니다. 서정적인 감상을 절로 일으키는 그림체 위로 들어찬 글은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세계, 그 순환을 비춘다. 그러나 순환과 재생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는 닿음,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지식으로는 닿지 못한 연결성을 내보인다.

그림책에 담긴 삶의 지혜

때는 봄, 시작은 산중에 사는 어느 나그네다. 그가 숲속에 핀 벚나무에게 다가가 묻는다.

"지지 않는 꽃도 있나요?"

그는 답을 알고 있는 듯도 하지만, 사라진 것이 어디로 가는지가 궁금하다. 그는 지난 겨울을 살아낸 터다. 그에게 산은 사라져 떠나간 것들로 쓸쓸하기만 하다. 만물이 피어나는 봄이라 해도 그의 마음은 지난 계절에 있는 것이다. 벚나무와 나그네의 대화는 어느 사찰에서 이뤄지는 고승의 선문답을 떠올리게 한다.
나그네는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 씁쓸하기만 하지만, 그를 벗어날 도리가 없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로 저 또한 사라져 없어지고 말 것이다. 납득하기 어렵지만 받아들일 밖에 없는 것, 벚나무와 나그네의 대화를 지켜보는 보는 이 또한 그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책 속에서
ⓒ 천개의바람
책이 나그네라 칭하는 이는, 실은 곰이다.

작가의 그림은 인간이 아닌 동물, 곰을 그린다. 곰과 꽃이 대화를 나누고 인간은 그곳에 없다.

그러나 책은 때가 되어 마지막 숨을 내쉬는 곰과 어느 인간을 연결 짓는다. 곰의 자리에 사람이 일어나고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는 벚나무와 만난다. 어제의 벚꽃은 오간 데 없지만 벚나무는 우뚝 서 있다. 그 또한 계절이 가면 자리를 비킬 것이겠지만.
▲ ▲ 곰(자료사진).
ⓒ jeremyvessey on Unsplash
순환하고 재생하는 자연, 곰과 인간과 벚나무가 다르지 않음을 알도록 한다. 더 큰 세계가 존재하는 가운데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인간의 자아는 이 그림책 안에선 설 자리가 없다.

빛을 내뿜는 듯한 수채화가 책장 가득 들어차 있다. 우리가 아는 자연과는 또 다른 형태로, 그림책을 들여다 보는 이의 눈을 가득 채운다. 그를 보고 있자면 세상을 바라보는 이세 히데코의 남다른 시각, 깊이 있는 시선을 얼마쯤 공유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처음 등장하는 곰 나그네의 모습과 물음에서처럼 쓸쓸하고 슬픈 마음이 고개를 치켜드는 책이다. 그러나 한켠으론 그와 같은 사멸로부터 또 다른 잉태가, 후반부의 아이가 존재하게 된다는 걸 받아들이게 된다.

그건 경이로움이고 아름다움일 수 있겠다. 이 세계의 작동원리를 우리는 마주하고 받아들일 밖에 없다. 체념이나 외면이 아닌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생과 세계를 대하는 존재의 태도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이야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이세 히데코의 책은 그림책이 그저 십분이면 후딱 넘기게 되는 애들 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만든다. 짧게 보아도 오래도록 생각나는 장면, 그런 순간을 선사한다. 삶에 쉼표를 찍고 물음표를 남긴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와 물음표, 그것이 그림책의 역할이 아닐까. 사색이 귀해진 시대, 여백을 채우는 온갖 콘텐츠들 사이로 그림책을 찾는 이들이 어떠한 마음인지를 알겠다. 이따금 그림책을 펼칠 기회를 가져봐도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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