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문화] 기업에 고용된 장애 예술가들 “그림 그리고 월급도 받아요”

손영옥 2024. 10. 16.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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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예술 그 모퉁이를 돌다] <4> 기업은 어떻게
유진투자증권이 채용한 신경다양성 디자이너 직원들이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7길 한국과학기술회관에 입주한 키뮤스튜디오에 모여 강사 박진석씨의 지도로 디자인 수업을 받고 있다. 이들이 제작한 디자인 원화는 달력, 우산, PC 바탕화면 등 각종 굿즈로 재탄생한다. 권현구 기자


딸기 케이크 이미지를 단순화하는 솜씨가 뛰어난 유씨는 “그리는 게 재미있어 여기 온다”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폭죽을 그리는 김씨는 “집에서 혼자 하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그리니 좋다”며 웃었다. 사진 속 이미지를 보고 도안을 하는 거지만 누구는 구체적으로, 누구는 추상적으로 하는 등 개성이 다르다. 강사 박진석씨는 “나이는 청년이지만 감성이 아이처럼 맑아 이들과 함께 있으면 기쁘다. 각자에게 맞는 소재를 찾아주는 게 제 일”이라고 했다.

이날 공유 오피스 작은 사무실에서 펼쳐진 미술 수업 풍경은 한국 기업의 장애 예술가 고용 현주소를 한눈에 보여 준다. 즉 제도의 힘, 여기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기업, 그리고 장애인 구인과 구직을 이어주는 매개 회사의 존재 등 삼박자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변화가 느껴졌다.

ESG 경영 바람…장애인고용 기지개

정부는 장애인 고용 촉진을 위해 상시근로자 5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주에게 일정 비율 이상의 장애인을 고용하도록 하고, 또 100명 이상 고용 사업장에 대해서는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부담금을 납부하게 하는 장애인의무고용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의무고용률은 제도가 도입된 직후인 1991년 공공기관 2%, 민간 1%로 제시됐고, 점차 높아져 2014년 현재 공공 3.8%, 민간 3.1%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100인 이상 기업이 장애인을 한 명도 고용하지 않는 경우 현재 월 고용부담금은 600만원 남짓이다. 그러다보니 대기업 중에는 차라리 부담금을 내겠다는 곳도 적지 않아 지켜지는 비율이 30%대에 그친다. 장애인 고용 의무 불이행 기업 명단에 10년 연속 공표된 기업도 상당수다.

이런 가운데 2020년대 들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기업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따르면 기업들이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 장애인 고용으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벌이면서 장애인 채용이 늘고 있다.

대기업들은 장애인표준사업장을 만드는 곳도 있다. 장애인표준사업장이란 중증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안정된 근로 조건에서 일할 수 있게끔 일정 기준을 충족한 사업장에 대해 공단이 인증하는 제도다. 대기업들의 경우 자회사를 설립해 장애인을 고용하면 모회사에서 고용한 것으로 간주되는 ‘자회사형 표준사업장’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 LG, SK 등 대기업에서 이미 표준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 구직·구인 매개 회사도 생겨나


세태가 달라지면서 장애인 구직·구인 수요를 연결해주는 회사도 생겨나고 있다. 사단법인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서울시의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커리어플러스센터도 그런 기관 중 하나다. 2017년 2월 개관한 서울시립 커리어플러스센터는 서울 지역 내 발달장애인 구직자들의 취업을 지원한다. 특히 2021년부터는 청소, 회의실 관리 등 노무 분야뿐 아니라 미술 분야로 취업 알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술 분야 취업은 2021년 5명에서 지난해 22명까지 늘었다. 올해도 9월까지 18명이 취업했다. 미술 분야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까지 총 48명의 신경다양성 청년 예술가들이 커리어플러스센터를 통해 서울시립교향악단, 푸드테크, 이스트소프트 등 23개 업체에 채용돼 월급을 받는다.

제2회 국민일보 아르브뤼미술상 대상을 받은 다운증후군 천민준 작가도 커리어플러스센터의 중개로 메가스터디의 장애인표준사업장인 메가스터디교육에 지난해 5월부터 채용돼 월급을 받고 있다. 재택근무 방식인데, 주 5일 하루 4시간 그림을 그리고 3개월에 캔버스 10호 기준 작품 1점을 회사에 제출하는 조건으로 월 125만원을 받는다. 장애 예술가들이 제출한 작품은 회사의 카페, 기숙 학원 등에 전시 된다.

커리어플러스센터 홍보팀 관계자는 “부담금에 대한 부담 때문에 장애인 직원을 채용하긴 해야하는데, 고용해서 무슨 일을 하게 할지, 채용 후에는 어떻게 인사 관리를 할지 등의 문제로 고민하는 기업이 적지 않다. 그래서 저희가 고용부담금을 내고 있는 업체 쪽에 접촉을 해서 채용을 연계해 주기도 한다”면서 “장애 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준비가 안 돼 있는 업체들은 아무래도 재택근무를 선호하는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비장애·장애 직원 교류 늘려야

유진투자증권의 비장애 직원과 장애 직원 간 교류 행사. 유진투자증권 제공

장애인의무고용은 재택근무 방식이라도 장애인의 경제적 자립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포용적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신경다양성 작가들이 비장애 직장 동료와 만나는 접점을 넓히고 궁극적으로는 한 사무 공간에서 작업하는 시대가 열려야 하지 않을까. 실제 자폐 증상은 비장애인과 섞여서 활동할 때 개선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고경모 대표와 장애 직원 가족 간담회. 유진투자증권 제공


유진투자증권의 사례는 포용적인 작업 환경을 구축하는 중간 과정으로 비춰져 흥미롭다. 유진투자증권은 2021년 ‘임팩트 투자(수익 추구를 넘어 사회와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업이나 기업에 투자하는 형태)’의 하나로 키뮤스튜디오에 투자를 했다. 그것이 계기가 돼 신경다양성 청년 디자이너 9명을 직원으로 채용했고 현재까지 고용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키뮤스튜디오의 ‘키뮤 브릿지’ 프로젝트는 장애 디자이너에 대한 취업 알선과 미술 교육 대행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디자인 회사인 키뮤스튜디오는 장애 디자이너와 비장애 디자이너를 모두 채용해 시너지를 낸다. 즉 장애 디자이너가 제작한 원화를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비장애 디자이너가 재가공해 다양한 굿즈로 재탄생시키는 구조다.

장애 디자이너의 디자인 작품으로 탄생한 다양한 굿즈들. 유진투자증권 제공


유진투자증권 소속 장애 디자이너들은 재택근무를 하지만 주 2회 키뮤스튜디오로 가서 동료 장애 작가들과 함께 그림 수업을 받는다. 매월 10종의 디자인 원화를 제출하고, 또 원화를 활용해 PC바탕화면 1종을 제출한다. 또 신입사원 환영용 굿즈, 고객용 골프 굿즈, 법인 고객용 키트 디자인 등을 제작한다. 창립 70주년 엠블럼도 이들이 제작한 원화가 활용됐다. 유진투자증권은 장애 디자이너와 비장애 직원 간 교류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고경모 유진투자증권 대표를 위시한 임원진과 장애 작가·부모 간 간담회도 갖는다. 브랜드전략팀 권수인 과장은 “발달 장애 디자이너 직원과 소통하고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점차 마음이 열리고 동료애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서로 눈을 맞추며 소통하는 건 어려워했지만 파트너를 배려하고 함께 완성한 작품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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