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한강 티핑 포인트, 그 후
한국 영화 전도사를 자처했던 프랑스 영화인 피에르 리시앙(1936~2018). 임권택·이창동 등 한국 감독을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 소개한 인물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들 감독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종종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강릉국제영화제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던 배경이다.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고, 한국 드라마가 시청률 1위를 기록한 건 리시앙 같은 한국 문화 메신저들의 보이지 않는 활약이 사반세기 이상 켜켜이 쌓인 덕이 크다.
매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던 리시앙을 만나 한국 문화의 매력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즉답했다. “사람들.” 비극의 역사 속에서도 특유의 에너지와 역동성을 거리낌 없이 분출해내는 사람들 때문에 한국 문화의 매력을 느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외국인이 “앤니엉하세요우”만 해도 환호하고, “김치”가 “기무치”가 될까 우려하던 시절, 한국 특유의 에너지를 먼저 알아봤던 셈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이런 흐름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 할 만하다. 작은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 갑자기 큰 변화로 분출하는 지점이어서다. 봉준호 감독이 2020년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쥐고 언급했던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넘어, 한국어로 쓰인 문학작품이 현존 최고 권위의 상을 받았다는 건 단순한 애국심 고취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모국어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읽는 기쁨이 이리도 느닷없이 오다니 어리둥절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간 축적되어온 한국 문화의 작은 변화들이 분출한 결과라 읽는 게 타당하겠다. 그 축적의 시간 속에 국내외 번역가와 출판사 등 다양한 이들의 노력이 있음은 물론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노벨상이라는 압도적 기쁨에도 일각에선 혐오의 에너지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 한 작가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두고 특정 지역과 사상 스펙트럼에 반대한다며 혐오의 언어를 배설하는 이들 이야기다. 다름을 틀림으로 맹렬하게 주장하는 그악스러움, 댓글 창의 익명성에 기댄 졸렬함은 공포스럽기조차 하다. 어느 한쪽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한국 사회를 찢어놓은 이런 목소리들은 도처에서 최고 데시벨로 날 것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귀는 막고 입만 열면서다. 에너지들이 쌓여 어떤 폭발로 이어질까 걱정스럽다.
리시앙은 “자신이 느끼는 바를 거리낌 없이 분출하고 그 때문에 서로 갈등하면서도 결국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게 한국 문화의 힘”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혐오 목소리는 아름다움의 궤도를 이탈했다. 현 상황에 취해있을 때가 아니지 않을까.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티핑 포인트 그 후가 더 중요할 터다.
전수진 투데이·피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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