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의 심리만화경] 맑음이의 슬퍼할 자유
“사람들은 나를 맑음이라고 부른다”라며 시작하는 뮤직비디오를 보았다. 싱그러운 느낌의 곡이었는데, 마음이 먹먹했다.
우연히 들은 노래는 밴드 QWER(사진)이 부른 ‘내 이름 맑음’이라는, 맑음이의 짝사랑 실패기를 담은 곡이었다. 남몰래 감춰오던 마음을 고백했는데, 망했다. 까짓거 별거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힘들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마음이 먹먹했던 이유는 ‘어쩌다 고작 그 마음도 못 참고~’라는 노래 가사 속 ‘고작’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나의 정체성은 의외로 내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이 수립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불리는 이름으로 규정되곤 한다. 내가 ‘누구 아빠’로 불리면 나는 아빠로서의 정체성을, ‘교수님’으로 불리면 선생님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때 말에 힘이 있다는 말처럼 이름이 가져오는 또 다른 압박도 함께 존재한다. 누구 아빠로 불릴 때는 자상 모드를, 교수님이라고 불릴 때는 조금 더 근엄, 진지 모드를 유지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든다. 주변에 그런 아이들이 있다. ‘착한 아이’로 불리는 아이들. 어떤 일이 있어도 즐거운 기분을 간직하는 아이들. 그런데 그 ‘착함’은 가끔 족쇄가 된다. 친구들이 자신을 막 대해도, 중요 결정에 자신의 의견이 충실히 반영되지 않아도, ‘착하다’는 정체성은 ‘고작 그 불만’도 표현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노래 속 맑음이도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숨기도록 강요당하며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고작’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갔다.
나에겐 두 아이가 있다. 매사에 자신의 불만을 쏟아내는 둘째에 비해, 큰 아이는 언제나 ‘순하고 착한 첫째’로 불린다. 그래서인지 큰 아이는 안쓰러워 보였다. 저 아이도 힘들고 싫은 게 있을 텐데, 짜증을 표현할 자유조차도 주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맑음이들도 맘껏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며 슬퍼하고 짜증 낼 자유가 있는 법인데 말이다.
최훈 한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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