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세영 특파원의 여기는 베이징] 홍위병의 상징이었던 쑹빈빈, 역사의 뒤안길 떠났지만…

송세영 2024. 10. 1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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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대혁명에서 교수·교사에 대한 폭력을 주도했던 쑹빈빈이 1966년 8월 18일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첫 홍위병 집회 당시 천안문 성루에서 마오쩌둥에게 붉은색 완장을 채워주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지난달 16일 미국 뉴욕에서 향년 77세로 사망한 쑹빈빈의 노년기 모습. 엑스 캡처, 국민일보DB
中언론 문혁 불지핀 쑹의 죽음 쉬쉬
쑹, 사과했지만 유족에 용서 못 받아
비극적 역사 마주해야만 화해 가능
작가 모옌 향한 공격… 두려움 느껴져

중국의 ‘혁명원로’ 쑹런충의 딸인 쑹빈빈은 19세였던 1966년 8월 18일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첫 홍위병 집회 때 천안문 성루에 올라가 마오쩌둥에게 ‘홍위병’이라고 적힌 붉은색 완장을 채워줬다. 당시 마오가 쑹에게 이름을 물은 뒤 ‘논어’에 나오는 “문질빈빈(文質彬彬·겉과 속이 조화를 이룬다)의 빈인가”라고 되묻고 “무력이 필요하지 않나(야오우마)”라고 말한 대목은 문화대혁명에서 일대 전환점이 됐다. 무력투쟁을 금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체회의 열흘 전 결정을 전면 부정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무력이 필요하다’는 뜻의 야오우(要武)로 이름을 바꾼 쑹은 광명일보와 인민일보에 쑹야오우 명의로 글을 싣고 “마오 주석이 우리에게 방향을 밝혀줬다. 우리에게 폭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10, 20대가 주축인 홍위병들이 각계에 침투한 ‘계급의 적’을 색출하겠다며 무법적 폭동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학생들이 교사와 교수를 때려죽이고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고 오랜 문화유산을 한순간에 파괴하는 문혁의 광풍이 중국 전역에 불어닥쳤다.

1916년생으로 당시 50세였던 볜중윈은 쑹이 재학 중이던 베이징사범대부속여중의 교감이었다. 첫 홍위병 집회를 2주가량 앞둔 1966년 8월 5일 제자들로부터 비판 투쟁 대상이 돼 몽둥이와 금속 버클이 달린 군용 혁대로 장시간 집단구타를 당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데도 홍위병 제자들은 응급처치를 거부하고 대자보로 덮어둔 채 5시간 넘게 방치했다. 볜은 문혁에서 학생들이 때려죽인 첫 교사였다. 이후 베이징에서만 1772명의 교사와 교장 등이 홍위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 학교 홍위병 책임자 류진은 이튿날 학교방송을 통해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을 때리는 건 당연하다. 죽으면 죽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볜은 베이징의 명문이었던 옌징대 출신으로 194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인민일보 창간에 참여하고 편집자로 일했다. 1949년 베이징사대부여중으로 옮긴 뒤 교감이자 학교 당위원회 서기가 된 그는 문혁 초기인 1966년 5월부터 ‘반당·반사회주의 분자’라는 비판을 받으며 제자들의 모욕과 폭행에 시달렸다. 사건 전날 남편 왕징야오가 고향으로 도피할 것을 권유했지만 “인간 존엄성을 위해 도망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볜이 살해당할 당시 쑹은 이 학교 학생조직의 간부였다.

자기 학교 교감을 때려죽이고 마오에게 완장을 채워줌으로써 문혁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 쑹이 지난달 16일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혁 자체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는 지도부의 의중이 반영됐는지 중국 관영 언론들은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쑹이 198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전력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반면 중국 소셜미디어엔 쑹과 문혁에 대한 글들이 꽤 올라왔다. 쑹이 누구인지를 조명하고 공과를 논하는 글이 많았는데, 결이 전혀 다른 글 하나가 큰 논란을 불러왔다. 볜이 1947년 허베이성 우안현의 토지개혁 때 무고한 사람을 무참히 학살했다고 주장한 글이었다. 당시 볜이 저지른 학살이 문혁 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의미였다. 전직 언론인과 블로거들은 당시의 기록과 지인들의 증언을 기초로 반박하고 있다. 볜이 우안현의 토지개혁에 관여한 것은 맞지만 폭력사태 발생 이후였을 가능성이 크고, 개인적 성향 등으로 볼 때 직접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취지였다.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중국 정부가 역사적 비극의 실체와 진상을 규명하는 데 부정적인 한 앞으로 밝혀질 가능성도 크지 않다. 중국에선 공산당이 연루된 비극은 학계의 연구 대상으로도, 문학예술 소재로도 금기시된다. 실체 없이 제각각 다른 기억만 전승되면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모호해진다.

쑹이 2014년 모교를 찾아 볜의 흉상에 참배하고 그를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해 학교와 유족에게 사과했지만 유족이 용서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 93세였던 볜의 남편 왕은 “48년이 지났지만 주동자와 살인범이 잡히지 않았다.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홍위병의 거짓 사과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쑹은 2007년 공개한 장문의 글에서 볜에 대한 폭력에 자신은 가담하지 않았으며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누가 폭력을 휘둘렀는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왕은 이 사건에 배후가 있고 쑹이 진상을 은폐한다고 의심했기에 쑹의 사과가 거짓이라고 단언했다.

작가 쉬카이정은 웨이보에 올린 글에서 “역사는 멀어지고 관련된 인물들도 하나둘 멀어진다. 쑹도 멀어졌고, 볜의 남편 왕도 2021년 8월 별세했다”면서 “하지만 역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이 서로 다를 뿐”이라고 말했다.

비극적 역사를 마주하지 않으면 용서나 화해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극의 반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국 유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모옌을 매국노라고 공격하는 애국주의 네티즌들의 극단주의적 행태를 보면서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목이다.

송세영 특파원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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