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K증시…7대 고질병 [스페셜리포트]
올해 들어 한국 코스닥지수가 글로벌 주요 증시 가운데 수익률 꼴찌였다. 코스피지수 역시 글로벌 지수 하락률 4위의 불명예를 안았다. 세계 국내총생산(GDP) 상위 20개국과 홍콩, 대만 등 22개국의 올해 1~3분기 증시에서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한 지수는 한국 코스피·코스닥, 멕시코 S&P/BMV IPC, 러시아 RTSI 등 4개뿐이다. 코스닥은 -13%대로 23개 지수 가운데 꼴찌였다. 우크라이나와 장기간 전쟁 중인 러시아 RTSI지수 수익률 -10%만도 못하다.
글로벌 증시는 상반기 인공지능(AI) 열풍에 힘입어 미국의 거대 기술주를 중심으로 랠리를 펼쳤다. 하반기에는 미국 중앙은행(연준)의 빅컷(기준금리 0.5%포인트 인하)과 중국의 대규모 경기 부양책이 불을 지폈다. 이에 힘입어 미국 나스닥, 대만 자취안지수는 20% 이상 올랐다.
한국 증시는 이런 호재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경기 침체 우려로 바닥을 기던 중국 증시까지 반등하자 한국 증시의 소외감은 더 두드러졌다. 전문가들은 한국 증시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다고 입을 모은다.
1. 투자자 울리는 부실 공시
금양 정정 공시 거센 후폭풍
잊을만 하면 불거지는 부실 공시는 증시 불신을 증폭시키는 ‘고질병’이다. 최근 금양 사태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리튬 광산 생산 실적 전망을 대폭 축소하며 대규모 유상증자까지 단행해 투자자를 충격에 빠뜨렸다. 지난해 5월 금양은 몽골 광산 개발 회사 몽라(Monlaa LLC) 지분을 취득하기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당시 금양은 해당 투자로 매출액 4024억원, 영업이익 1609억원을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시 다음 날 금양 주가는 18% 올랐다.
그러나 지난 9월 27일 금양은 몽골 광산의 올해 매출과 영업이익 전망치를 각각 4024억원에서 66억원으로, 1609억원에서 13억원으로 하향 조정했다. 정정된 매출과 영업이익 추정치가 기존 전망치의 각각 1.4%, 0.8%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시장에서는 투자자를 기만했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는다. 금양 측은 “몽골과 사업 추진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와 지난해 하반기 굴착에 필요한 채굴용 설비 기초 공사 기간이 지연됐다”는 입장만 내놨다. 한국거래소는 금양이 장래 사업·경영 계획을 거짓 또는 잘못 공시했다며 불성실 공시법인 지정을 예고했다.
450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결정한 것을 두고도 투자자 원성이 높다. 금양은 몽골 광산 정정 공시를 냈던 지난 9월 27일 주주 배정 후 실권주 일반공모 방식으로 450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진행한다고 공시했다. 투자자들은 몽골 광산 부실 공시에 이어 유상증자까지 겹악재를 맞았다며 성토한다. 이 회사는 올 상반기 영업손실 181억원으로 전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같은 기간 당기순손실은 86억원에서 550억원으로 급증했다. 1년 안에 상환해야 하는 유동부채는 7924억원에 달하지만 유동자산은 1184억원, 현금성 자산은 260억원에 불과하다.
불성실 공시 논란은 해마다 반복되지만, 투자자 피해 대비 규제 실효성은 취약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불성실 공시법인 지정·지정 예고’는 384건으로 집계됐다. 이미 지난해 연간 지정·지정 예고 건수(381건)를 넘어섰다. 지난해 말 금융감독원이 7개 테마 업종을 신규 사업 목적으로 추가한 상장사 233개사를 조사했더니, 이 가운데 55%가 관련 사업을 전혀 추진하지 않은 것으로도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공시 사실의 공표, 개선 계획서 제출을 요구하는 수준으로는 부실 공시를 솎아내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최근 1년간 코스피 상장사가 불성실 공시법인으로 지정된 건수는 34건이다. 평균 벌점 2.3점으로, 벌점에 따른 페널티는 사실상 없는 수준이다. 벌점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소멸한다. 금양 역시 지난해 불성실 공시법인으로 지정된 지 1년이 지나 누적 벌점이 0.2점에 불과하다. 금양은 지난해 5월에도 자사주 처분 계획 발표를 지연 공시한 사유로 불성실 공시법인으로 지정됐다.
물론 벌점 누적으로 관리종목 지정 뒤 1년 동안 추가로 벌점 15점을 받으면 해당 상장사는 상장 적격성 실질 심사 대상에 오른다. 하지만 불성실 공시법인 지정만으로 퇴출 사례는 전혀 없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투자자 보호를 위해 불성실 공시 기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으며 금전적 제재가 있어야 상장사에 실질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25년째 삼전 시총 1위…무너지니 나락
우리 증시가 대만, 인도 등 아시아 주요국 사이에서도 존재감이 미약한 배경으로는 산업 역동성 실종이 첫손에 꼽힌다. 경기·환율 민감도가 높은 반도체·자동차에 편중된 자본 집약적 산업 구조가 고착화한 가운데 우리 증시에서는 삼성전자 이후 ‘스타 기업’이 실종된 지 오래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 시가총액 10위권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 현대차, 삼성바이오로직스, 기아, 셀트리온, KB금융, 포스코홀딩스, 네이버 등이 자리한다. 삼성전자는 1999년 이후 25년간 시총 1위다. 네이버, LG에너지솔루션, 삼성바이오로직스 정도를 빼면 최근 수년간 10위권 내 눈에 띄는 변화는 거의 없었다.
전문가들은 자본 집약적 산업에서 모방으로 선진국을 따라잡는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고도 성장 신화를 써온 한국 경제가 기로에 섰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반도체·스마트폰·자동차 등 한국 주력 산업은 선진국을 따라 하는 모방·추격 전략으로 세계 선두권 성과를 일궜지만 최근 수년간 ‘피크아웃’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산업 구조 다변화·고도화에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인공지능(AI)·자율주행 등 미래 첨단 분야에서 선진국과 격차는 커지는 반면, 기존 자본 집약적 산업에서는 중국에 빠르게 추격당하는 ‘샌드위치’ 신세가 고착화했다.
가령, 반도체 산업은 기존 중앙집중적 생산 구조에 기반한 범용 비즈니스에서 주문형·수주형 산업으로 변화한다.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요구되는 혁신 역량과 커스텀 비즈니스에서 요구되는 혁신 역량은 서로 다르다는 게 반도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는 중이지만, 삼성전자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우리 기업이 세계 시장을 석권했던 중후장대 산업은 중국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석유화학, 철강 등 주요 산업은 비상이다. 중국 석유화학, 철강 기업이 대대적인 수출에 나서면서 범용 제품부터 가격이 폭락했다. 국내 기업은 중국 업체와 출혈 경쟁을 벌이며 생존 경쟁에 내몰렸다.
반면, 대만과 인도 등은 민관 부문 유기적 협업으로 대표 기업 교체 등 경제 체질 변화가 상시 진행 중이다. 덕분에 자국 증시에도 활력을 불어넣는다. 대만에선 한때 ‘대만의 삼성’이라 불렸던 애플 위탁생산 업체 폭스콘에서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로 증시 대표 선수가 교체됐다. 대만은 법인세율(20%)이 한국(24%)보다 낮고 각종 감면으로 실효 세율은 이보다 더 낮다. 첨단 미래 산업에 대한 정부 규제도 상대적으로 적다. 인도는 탄탄한 내수를 기반으로 유통과 금융 등 주력 산업 육성이 한창이다. 인도에선 석유·통신 대기업 ‘릴라이언스인더스트리’, 재벌 그룹 타타그룹 소속 IT 기업 ‘타타컨설턴시서비스’ 등이 증시 대표 기업이다. 이들 대장주뿐 아니라, 시총 10위 기업 목록에는 은행·금융 기업이 새로 진입하는 등 증시 역동성이 높아졌다.
野 1년 내내 오락가락…큰손 이탈 불러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올해 내내 투자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금투세는 대주주 여부에 상관없이 국내 주식으로 5000만원이 넘는 금융소득을 올린 투자자에게 22%(3억원 초과분은 27.5%)의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다. 내년 1월 시행 여부를 놓고 정치권에서는 아직까지 공방만 벌인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은 금투세 도입에 관한 당론 결정을 지도부에 위임하기로 했다. 의원들이 지도부에 위임한 만큼 금투세 당론은 유예로 기울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민주당 당론이 유예로 가닥이 잡히더라도 불확실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정치적 이벤트를 등에 업고 언제든 우리 증시 전면에 등장할 수 있단 점을 시장은 우려한다. ‘금투세 리스크’를 헤지하려는 매도 물량은 이미 출회되고 있다는 게 시장의 대체적인 진단이다. 대형 증권사 지점장은 “자산 규모가 큰 개인 투자자들은 올 상반기부터 담당 PB들에게 금투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주식과 채권 등 비중을 줄여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며 “한 번에 매도할 수 없으므로, 올 연말까지 월별로 시황에 맞춰 단계적으로 일정 비율을 매도해달라는 요구가 많았다”고 귀띔했다.
전문가들은 금투세가 몰고 올 여러 부작용을 우려한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에 따르면, 금투세 대상은 전체 투자자의 1%인 15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비율은 높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들 ‘슈퍼 개미’의 영향력을 일반 투자자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특히 개인 투자자 비중이 높은 코스닥에서는 이들이 국내 투자를 줄이는 과정에서 시장 변동성이 대폭 확대될 수 있다. 이미 우리 증시에서는 주식 양도소득세 과세 대상 확대 과정에서 10월 이후 변동성이 대폭 확대되는 악순환에 노출돼 있다.
무엇보다 개인 투자자들이 한국 증시에 투자할 유인이 사라진다는 점이 금투세의 근본 문제점으로 지목된다. 현재 국내 증시에서는 주식 매매에 따른 거래세만 내면 투자수익에 대해 별도 세금을 부과하지 않아 그나마 해외 증시 대비 경쟁력이 있단 평가를 받았다. 금투세 시행 때는 주주환원율 89%(KB증권 분석)인 미국 주식을 사지 한국 주식을 살 이유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들끓는다.
금투세 시행 땐 자산가 ‘회색지대’ 조장을 부추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가령, 과세 대상이 되는 펀드 분배 수익을 받지 않고 모아뒀다 펀드를 환매하고 청산하는 방법으로 금투세 적용을 받으면 27.5%의 세금만 내면 된다. 소수 인원이 참여하는 사모펀드에서는 이 같은 조세 회피 전략을 손쉽게 펼 수 있다. 1인 법인 설립을 통한 금투세 회피도 가능하다. 금투세는 개인에게만 적용될 뿐 법인은 해당되지 않는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이미 주요 은행 거점 PB센터에서는 금투세 회피용 1인 법인 설립을 권하는 사례가 많다”며 “애먼 중산층만 금투세 폭탄을 맞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내 증시 당일 매매 비중 40~60%
소셜미디어(SNS)에서 떠다니는 불확실한 정보도 국내 증시 불신을 키우는 원인 중 하나다. 유튜브에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포함된 주식 관련 영상이 수두룩하다. 가장 큰 문제는 유튜브에서 제작자의 수익이 영상 조회 수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거짓 정보를 유통해도 영상 조회 수만 높으면 제작자에게 수익이 돌아간다는 뜻이다.
리딩방에서 적극적으로 투자자를 유인하거나 금전 사기를 일삼는 경우도 많다. 이를 이용해 주가 조작 세력이 단타 위주 투자를 부추긴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리딩방에서 퍼지는 불확실한 정보에 투자자가 과하게 몰입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며 “단기간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성 단타 매매가 성행하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이어 “제도권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고 시장 질서를 훼손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며 “범죄를 통해 수익을 확보하는 세력을 선망하는 잘못된 문화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국내 증시에서 단기 거래는 심각한 수준이다. 2020년 이후 당일 매매(데이트레이딩) 비중은 코스피 40%, 코스닥은 55% 수준이다. 코스피 데이트레이딩 비중은 2022년 38%, 2023년 41%, 2024년 40%로 나타났다. 코스닥은 더욱 심각하다. 2022년 54%, 2023년 56%, 2024년 57%로 3년째 증가세가 이어진다.
또한 우리나라 주식 시장 규모가 작다는 점도 주가 조작에 취약한 원인으로 꼽힌다. 한국 주식 시장 전체 규모가 미국 개별 종목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다. 미국 증시에는 우리나라 주식 시장 전체 시가총액보다 규모가 큰 기업이 무려 6곳이나 있다. 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수급에 따른 변동성은 더욱 확대되고, 투자자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거래량이 적은 종목일수록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진다.
결국 금융 범죄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 중론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한국은 처벌에 관대해 금융사기 사건 발생이 많다”며 “지금처럼 주가 조작이 판을 치는 한국 주식 시장의 투자 매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처럼 강력한 처벌로 공정거래가 자리 잡도록 해야 정부가 강조하는 밸류업도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처벌 강화와 함께 범죄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필수교육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실물경제와 관련한 교육이 미흡한 편인데 사전적 범죄 예방 시스템의 고도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교육을 통해 투자자도 미공개 정보 활용으로 인한 수익 창출은 범죄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주주 가치 훼손…자회사 주가도 ‘뚝’
빈번하게 나타나는 중복 상장 논란은 국내 증시 매력을 떨어뜨린다. 국내 증시에선 기업이 자회사를 물적분할해 상장하는 사례가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는 곧 소액주주 피해로 연결된다.
최근 두산그룹도 비슷한 문제로 논란을 일으켰다. 두산그룹은 두산에너빌리티에서 두산밥캣을 분할해 두산로보틱스의 완전 자회사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당연히 두산에너빌리티의 기존 주주는 알짜 회사인 두산밥캣의 분할에 강력히 반발했다. 결국 소액주주 피해가 부각되며 금융당국이 제동을 걸었다.
중복 상장 논란은 과거부터 끊이질 않았다. 앞서 2022년 LG화학이 배터리사업부를 물적분할해 LG에너지솔루션을 상장시키면서 LG화학 시가총액은 약 25조원이 증발했다. 2021년 SK케미칼도 SK바이오사이언스를 물적분할한 뒤 상장시키며 기존 주주 가치를 훼손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자회사를 물적분할 후 상장시킨 기업 대부분은 주가가 내리막을 걸었다. LG에너지솔루션 상장 후 LG화학 주가는 3개월 동안 18% 하락했다. SK케미칼 역시 SK바이오사이언스 상장 후 주가가 3개월간 9% 하락했다. SK이노베이션은 자회사 SK아이이테크놀로지 상장 후 3개월 동안 주가가 10% 내렸다. 카카오뱅크 상장 후 카카오 주가도 3개월간 12% 떨어졌다. HD현대중공업 상장 후 HD한국조선해양 주가는 3개월 동안 6% 하락했다.
상장한 자회사 주가도 부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장 후 3개월 동안 LG에너지솔루션은 17%, SK바이오사이언스는 5%, 카카오뱅크는 18%, HD현대중공업은 18%씩 주가가 내렸다. 결국 상장한 모·자회사 주주 모두 웃지 못한 셈이다.
대주주뿐 아니라 소액주주 권리도 고려하는 기업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중복 상장은 결국 대주주와 소액주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물적분할에 이은 자회사 상장은 대주주 입장에서 자본 조달 부담을 덜고 자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며 “다만 이는 소액주주의 주주 가치 훼손은 물론, 국내 증시 저평가의 주요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해외에서는 중복 상장이 일반적이지 않다”며 “국내 중복 상장 비율은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증시에 비해 높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중복 상장 논란을 줄이기 위해서 정부가 기준과 규제를 명확히 정립해야 한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대기업 중복 상장에 대한 합리적 판단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며 “일방적인 제재보다 기존 주주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확인하고, 이에 근거해 기업의 무분별한 중복 상장을 제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모회사만 남겨두고 자회사는 통합할 수 있는 유인책도 생각해볼 만하다”고 덧붙였다.
투자자의 적극적인 행동도 필요하다. 최근 기업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소액주주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는 분위기다. 두산그룹의 사업 구조 재편에 대한 제동이 걸린 이유도 소액주주가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소액주주도 주주로서 적극적으로 의사를 나타내야 한다”며 “기업의 불합리한 의사 결정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정권 바뀔 때마다 방향성 바뀌어 혼란
연속성 없는 관제 정책은 국내 증시 불신 바이러스다. 역대 정부마다 다양한 관제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 방향성이 바뀌며 이전 관제 정책 효과가 줄어드는 현상이 반복된다. 결국 단기적인 처방과 홍보에만 급급하고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관제펀드가 대표적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의 정책 기조를 반영한 금융상품이 등장했다. 노무현정부의 선박펀드, 이명박정부의 유전펀드, 박근혜정부의 통일펀드, 문재인정부의 뉴딜펀드 등이다. 그러나 해당 펀드 수익률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2020~2021년 등장한 뉴딜펀드는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 중인 상품이 수두룩하다. ‘TIGER 탄소효율그린뉴딜’ ‘KODEX 탄소효율그린뉴딜’ ‘HANARO 탄소효율그린뉴딜’ ‘KBSTAR Fn K-뉴딜디지털플러스’ 등이 상장 후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 중이다. 2014년 박근혜정부 시절 등장한 통일펀드 1호인 ‘신영마라톤통일코리아증권자투자신탁(주식)A형’은 최근 3년간 8% 넘게 떨어졌다. 또 다른 대표적인 통일펀드 ‘브이아이코리아통일르네상스증권자투자신탁(주식)A’ 역시 최근 3년간 17% 내렸다.
이명박정부 때 활성화된 유전펀드도 마찬가지다. 특히 미국 텍사스주에 있는 육상 유전에 투자하는 ‘패러렐펀드’는 공모 당시 4000억원 모집에 청약금만 9416억원이 몰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패러렐 유전 추정 매장량과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투자자의 대규모 손실로 이어졌다. 노무현정부 시절 우후죽순 생겨난 선박펀드도 흑역사로 꼽힌다. 2002년 선박 투자 회사 도입 후 활성화된 선박펀드는 투자금으로 선박을 사서 해운사에 빌려준 뒤 용선료(임대료)로 수익을 내는 방식이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 해운 업황 부진이 이어지고 절세 혜택도 축소되며 투자자 관심에서 멀어졌다. 선박 투자 회사가 대규모 순손실을 내며 상장폐지됐고, 증권사가 판매한 선박펀드는 수백억원대 손실을 봤다.
최근 정부에서 내놓은 ‘코리아 밸류업 지수’에 대한 우려도 팽배하다. 국내 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해 정부와 금융당국이 야심 차게 마련했지만 시장에서는 아쉽다는 반응이 나온다. 저평가된 고배당 종목이 빠지고 주주환원에 인색했던 기업이 다수 편입돼서다. 지수 편입이 당연시되던 일부 금융주가 제외되며 종목 선정 기준에 대해 의문을 품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고태봉 iM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벤치마킹 대상인 일본 밸류업 정책이 효과를 볼 수 있었던 요인은 장기적 관점에서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한 결과”라며 “법인세 혜택 등 기업의 유보자금이 커질 수 있도록 당근을 함께 제시한 부분이 우리나라와 차이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은 기업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공감대를 얻기 전 일방적으로 추진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며 “밸류업 지수에 편입된 종목도 시장에서 의아할 정도로 기준이 모호하고 업종별 균형에 치우쳤다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관제 정책 성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근본적으로 정부가 경제 발전에 있어 증시를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밸류업 지수에서 알 수 있듯이 투자자 눈높이와 저평가된 국내 증시를 정상화할 전문 인력도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애플은 低성장 때 적극 주주환원
31%.
2013~2022년 10년간 한국의 평균 주주환원율이다(KB증권 자료). 주주환원율이란 기업이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쓴 돈을 순이익을 나눈 비율이다. 예를 들어 순이익이 100억원이면 31억원을 자사주 매입과 배당에 사용한다. 이는 주요 선진국에 비하면 꽤 낮은 수치다.
미국은 한국의 3배인 92%, 미국을 제외한 선진국은 68%다. 신흥국(38%)과 중국(32%)조차 우리보다 높다.
낮은 주주환원율의 절반은 배당 부족이 이유다. 우리나라는 배당 성향(당기순이익 중 현금으로 지급된 배당금 비율)이 전반적으로 낮다.
금융위원회 등이 지난 2022년 11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우리나라 배당 성향은 19.14%다. 대만(54.85%), 영국(48.23%), 독일(41.14%), 프랑스(39.17%), 미국(37.27%) 등과 대조된다. 30%대 초반의 주주환원율은 그동안 국내 기업들이 벌어들인 돈을 주주 몫으로 돌려주는 데 인색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배당 성향이 낮으니 우리나라 상장 기업을 장기적으로 보유할 유인책이 사라진다. 대신 ‘단타’가 성행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국내 증시 시가총액 회전율(시가총액 대비 거래 비율)은 2019년 0.36에서 2020년 0.8까지 올랐다. 2021년 0.71, 2022년 0.45, 2023년 0.48로 종전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큰돈을 굴리는 외국인 투자자 역시 국내 주식 시장에서 단타를 치고, 해외로 눈을 돌리는 형국이다.
전문가들도 한국 증시가 저평가에서 벗어나려면 주주환원율 상승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KB증권 등에 따르면, 현재 국내 상장사 ROE(자기자본이익률)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총 주주환원율은 76%다. 국내 상장사들이 40%포인트 이상 주주환원율을 끌어올려야 전체적인 수익성 개선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의미다.
ROE 수준을 높이는 가장 빠른 방법은 자사주 매입으로 시장 유통 주식 수를 감소시켜 주당순이익(EPS)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자사주 매입은 주주환원을 위한 기업 적극성을 보여주는 행동으로 평가받기에 투자 심리도 개선할 수 있다.
애플의 주주환원 사례는 곱씹어볼 만하다. 애플은 지난해 매출 성장률이 3% 줄어드는 등 성장 둔화가 확실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ROE는 139%로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 자사주 매입으로 유통 주식을 줄여 EPS를 높이기 때문이다.
김세환 KB증권 애널리스트는 “성장이 감소하는 시점에 자사주 매입을 확대해 이익의 하방경직성을 높이고 R&D에 집중해 영업이익 성장과 주주환원을 동시에 끌어냈다”고 평가했다.
짠물 배당을 막기 위해 배당소득세 완화 주장도 나온다. 한국은 배당소득과 이자소득을 합친 금융소득이 연간 2000만원 이하인 경우에만 세율이 15.4%다. 2000만원을 초과하면 근로소득, 연금소득 등 다른 종합소득과 합해 누진세율(6.6~49.5%·지방세 포함)이 적용된다.
반면 미국은 1년 보유 시 15% 분리과세, 중국과 베트남은 10%를 부과한다. 홍콩은 배당소득세율이 0%다. 이 때문에 배당소득을 분리과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증권가에서는 끊임없이 나온다.
다만 현행 세제로는 기업이 배당을 늘릴 유인이 적다. 대주주 세금이 특히 무거운데, 대주주가 이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우리나라 기업에선 배당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주주환원에서 배당과 같은 효과를 내는 자사주 매입은 자본 이득으로 환원돼 세금을 더 내지 않아도 돼 배당을 택할 이유가 더 줄어든다. 같은 주주환원에 대해선 동일한 방식으로 과세를 적용해 형평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명순영·배준희·문지민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0호 (2024.10.16~2024.10.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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