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일을 놓지 않아, XX" 내 머릿속 강타한 한 마디
다큐멘터리 <열 개의 우물>이 2024년 10월 30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70-80년대 여성노동과 인천 빈민지역의 탁아운동을 함께 했던 여성들을 조명했다. 그녀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어 그 시대를 살았는지, 그 이후의 삶의 이야기를 따듯하게 담고 있다. 가난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따듯하게 함께 품어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서 열 편의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편집자말>
[양미 기자]
"엄마가 일을 놓지를 않아 씨팔!"
-<열 개의 우물> 안순애 대사 중 일부-
동일방직 노동자 투쟁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안순애의 말이다. 그는 어머니의 가난하고 고단한 노동을 보며 "어머니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키 160센티가 되자 나이를 속여 동일방직에 취업했다.
내가 아는 여성-노동은 대부분 가난하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은 '국가-발전주의'를 통한 경제발전에만 몰두해 왔고, 앞으로만 내달리는 세상에서 여성과 여성-노동은 공짜로, 저임금으로 손쉽게 활용되다가 끝내는 남겨지는 쪽이었다. 게다가 '여자'가 하는 일이기에 '하찮다'는 모욕은 덤으로 따라다녔다. 모욕이 담긴 편견은 여성-노동 대부분을 '공짜'로 만들고, 임금시장에서는 저임금을 당연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공동체를 위해 먼저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존재였다.
그 당연한 존재가 희생을 거부할 때는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고, 희생은 진정성을 증명하는 기준이 됐다. 여성의 가난한 노동은 이렇게 유지되어왔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알 수 없다. 어떤 것이 먼저였는지. 모욕이었는지, 공짜 혹은 저임금이라는 노동에 대한 저평가였는지는. 내가 아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여성이라는 위치가 있고, 그 위치는 불평등과 모욕을 짊어질 운명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미 그렇게 완성된-것처럼 보이는-세상에 태어났고, 선택지는 넓지 않았다. 나는 받아들이거나 저항하거나, 혹은 그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생존하고자 했다.
▲ 수박 농사를 짓는 비닐하우스를 향하는 안순애 다큐멘터리 <열 개의 우물> 한 장면. |
ⓒ 감픽쳐스 |
그럼에도 그 모든 일은 여성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집안일 혹은 집에서 쉬는 것으로 치부됐고, 임금이 낮은 건 여자니까 당연한 거였다. 가족이 농사를 지을 때도, 펜션 등 가족 사업을 운영할 때도 여자들은 책임과 의무만으로 묵묵히 그 일들을 감당한다. 공짜가 되거나 저렴한 노동이다. 그럼에도 시골에서 이 문제를 대 놓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상에 당연히 녹아 있는 가부장주의로 인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조차 난감한 데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의 불편함과 어색함, 고립, 비난을 감수할 각오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골 여성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경제적, 문화적, 정신적 고립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고, 기사가 나간 후 그의 삶에 대한 걱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기사화할 수도 없었다. 할 말은 너무 많았지만, 할 말이 많다는 것이 문제처럼 느껴졌다. 분노와 안타까움, 슬픔, 투덜거림을 비난받지 않도록 쓸 수 있을까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공감을 부르면서도 자기연민에 빠져 타인을 착취하는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그리고 또, 이 모든 이야기가 이제는 지나간 옛날이야기, 지금 우리는 이 시절을 극복한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제기 하고 싶었다.
마침 그때 나는 영화 <열 개의 우물>을 만났다.
"아 씨팔, 누가 상 안 주나."
-<열 개의 우물> 안순애 대사 중 일부-
사람이 싫어 하늘과 나무를 보며 살겠다고 시골로 간 안순애는 농협의 부당함에 맞서고, 마을의 가부장적인 문화에 맞서 이장이 됐다. 마을에 들어오는 버스 배차를 늘리고 여름에는 수박 농사, 겨울에는 '시멘트 농사'(기자주 : 데모를 해야 하는데 다른 계절엔 농사로 바빠, 주로 농한기인 겨울 데모하며 사람들의 삶을 돌본다는 의미)를 지으며 여성농민운동가로 고립된 여성들을 연결했다.
▲ 다큐멘터리 <외박> 의 한 장면. |
ⓒ 감픽쳐스 |
"여성노동자들은 조직화도 힘들고 노동조합 활동에 불성실해."
"설사 파업에 동조하더라도 점거 농성은 힘들걸."
"아니, 한 달에 80만 원 반찬값 벌러 나오는 아줌마들이 파업이라니!"
"나는 그 파업 반대예요. 다들 그렇게 살아요.자기들만 힘든 것처럼 그러는 거 너무 이기적이에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기억이 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그 기억에 머물러 살아가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에겐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한다.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나는 여전히 2006년 가을부터 2008년,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한 대형할인마트에 머물러 있다. '이랜드 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510일간의 파업투쟁'으로 알려진 사건 한가운데다. 위 말들은 파업 당시 쏟아졌던 비난이다.
소위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되기 전부터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조합원들은 파업으로 맞섰다. 지도부의 예상조차 뛰어넘는 강력한 저항이었다.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은 대부분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었다. 당시 서비스업-여성-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온갖 모욕에 가까운 말들을 보란 듯이 뒤엎은, 그야말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열 개의 우물> 영화를 보며 이랜드 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떠올린 건 이 때문이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 운동은 자신의 힘으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는 여성노동자들이 남성중심 어용노조와 그들을 옹호하는 정부와 경찰에 저항했던 사건이었다. 모든 저항은 "빨갱이의 짓"으로 치부되고 남성의 권위에 반항하면 폭력으로 제압하는 것도 허용되던 사회적 분위기가 확고하던 시절이다. 여성노동자들은 저항했고, 남성 어용간부들은 폭력으로 대응했으며, 정부기관과 경찰은 여성노동자들을 잡아 가두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생계를 위협했다.
그런데 왜 여성노동자들의 저항의 방법은 "나체시위"로, 남성 어용간부들의 폭력은 "똥물투척"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을까? 나는 영화가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저항하는 여성노동자의 기억으로 진행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여성노동의 역사는 언제나 사회가 만들어 놓은 편견에 보란 듯이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저항을 이끌어 내는 힘은 증오와 불신이 아니라 돌봄과 연대의 마음이었다.
빈민지역으로 들어간 사람들
영화 <열 개의 우물>은 1980년대 빈민지역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돌보는 활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들은 왜 빈민지역으로 들어갔을까? 아마도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내가 기억하기에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계급운동은 공장이라는 일터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빈민운동은 계급운동진영에서도 민족운동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소위 '선택과 집중'이라는 효율의 문제는 운동진영 내에서도 팽배했던 시절이다. 그 시절 대공장/정규직이 아닌 노동/자, 여성, 빈민, 아동, 장애인, 환경(생태)는 모두 '사소한' '예외적인' 문제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갖거나 통일이 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로 간과되고 외면당했고 폄훼당했다.
1990년대 초 빈민지역에서 공부방활동을 했던 나는 양쪽 진영에 내가 하는 활동의 '당위성'을 증명하고 해석하기 위해 고심했던 기억이 있다. 온갖 비난과 활동에 대한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나는 빈민운동 또한 중요한 계급투쟁의 현장이라고 생각했다. '왜 어떤 저항은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의문을 품은 채였다. 그리고 가난한 여성노동자로 살아갈 것이 분명한 내 삶도 마찬가지 운명임을 직감했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내가 서야 할 위치가 어느 쪽인지 분명히 깨달았다.
한편, 빈민지역에서의 공부방 활동 경험으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여성들이 왜 가난한지, 왜 조직화가 힘든지에 대한 것이었다. 가난한 빈민지역 여성들은 가난하고 무력한 남성 반려를 대신해서 일하거나, 더 많이 일하면서도 스스로의 재산이나 통장조차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생계와 양육, 돌봄, 가사를 전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저 의무와 책임뿐이었다.
나는 궁금했다. 여기서 도대체 가부장이 하는 역할은 뭘까? 여성들은 조직화가 안 된다고? 그 말은 시간에 쫓기고 삶에 내몰린 여성들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거나, 그냥 여성을 혐오하기 위해 하는 말일 뿐이다. 그렇게 나는 내 활동이 향해야 할 방향과 이유를 깨달았다.
활동은 개인의 삶의 고통에 연대하는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모든 가려진 목소리와 존재들이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저항할 때 함께하는 것이 활동이다. 그렇게 드러난 저항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고 더 많은 개인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끝내는 정치화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저항의 목소리가 구조적으로 배제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개인의 삶에 연대하고 응원하는 촘촘한 민주주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삶에 연대하는 촘촘한 민주주의'라는 내 활동의 지향점이 어디서 시작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깨달음은 언제나 '삶의 현장'에 있음을, 외면하지 않고 계속 질문하고 변화를 위해 저항하고자 할 때 온다는 것을 새삼 배운다. 영화에 등장한 모든 삶의 주인공들과 등장하지 않았으나 함께 한 이들의 삶에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덧붙이는 글 | '양미'는 글쓴이의 필명이며,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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