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배추값 2만원 시대…기후위기에 재조명받는 토종 씨앗
국내 토종종자 보급의 산실, 토종씨드림 변현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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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곡성 4000여 평 채종포 ‘은은가’에서 200여 종 길러
기후위기에 배추·감자등 타격…다양성 중시한 토종은 무사
45개 지자체 훑어 8000여 점 확보, 육종 거쳐 전국에 보급
이미 상업농 시대…완전 대체는 힘들어도 토종과 공존 모색해야
」
200여 종 작물을 품은 4000평 채종포
보성강과 섬진강이 갈라지는 곳에서 북쪽으로 솟은 통명산 자락에도 가을 색이 완연해졌다. 지난 8일 서울에서 5시간을 달려 전남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에 닿았다. 마을회관에서 산 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가팔라지는 소로를 따라 한참을 오르니 갑자기 탁 트인 농장이 펼쳐진다. 우리나라 토종 씨앗 수집과 육종, 보급의 총 본산인 ‘토종씨드림’의 채종포(採種圃)를 운영하는 농장, 은은가(隱誾家)다. 수확철을 맞아 평상에 널어 말리던 고추와 씨앗들을 손질하던 변현단(59) 대표가 농장을 함께 꾸려가는 구성원들과 반갑게 맞았다. 사무실에 앉기 전에 농장 소개부터 부탁했다. 볕 좋을 때 둘러보자며 변 대표도 선뜻 나섰다.
채종포는 질좋은 씨앗을 골라 받기 위해 특별히 마련해 가꾸는 농경지를 뜻한다. 4000여 평 규모의 은은가는 산을 개간해 만든 까닭에 대부분 다락논밭이다. 농기계를 들일 수 없어 수작업을 해야 하지만, 씨를 받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10여 평 단위로 잘게 구획된 여러 논과 밭에서 200점의 작물이 자라고 있다. ‘점’은 식물 1본(本)이 아니라 같은 종 안의 세(細)분류를 의미한다. 각 다락과 이랑마다 작은 명판이 종자의 근원을 알리고 있다.
“이것은 제비콩, 얘는 바닥콩, 저건 흰서리태….” 하나씩 짚어가며 호명하는 변 대표 얼굴엔 돌 지난 아이 볼을 만지는 것 같은 사랑스러움이 묻어났다. 농사 모르는 도시인 눈에 똑같아 보였는데, 변 대표 손길과 호명에 잎사귀며 줄기 생김의 차이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우리 콩과 고추 종류가 이렇게 많았나. 요즘 걱정이 많아서인지 역시 배추밭에 눈길이 많이 머물렀다. ‘60일 배추’는 이제 제법 잎이 커졌고, ‘150일 배추’는 실했다. 현재 은은가에선 무 6종과 배추 5종을 재배하고 있다. 더위를 무사히 넘겼냐는 질문에 변 대표는 “토종 배추 종류 중 상당수는 괜찮았고, 특히 은은가는 운이 더 좋았다”고 답했다.
밭에서 조금 위로 오르니 논이 나왔다. 벼가 익어 추수 직전인데 알곡과 밑동 모두 붉은 기가 돌았다. ‘붉은차나락’이라는 토종 품종이다. 1900년대 초 일제가 작성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땅에서 재배되는 벼 품종은 대략 1400여 종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50종이 안 된다. 변 대표는 “추수철 논이 황금물결이라는 것은 요즘 표현이고 원래 우리 논은 분홍·빨강·검정·노랑·흰색이 뒤섞인 오색 물결”이라고 설명했다. 붉은차나락 건너편 논의 북흑조는 진짜 검은 빛이었고, 맷돼지찰벼는 노랑색이었다. 모양과 색 뿐 아니라 품종별로 심는 시기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고 한다. 변 대표는 “작년까지는 조생·중생·만생의 구분이 뚜렷했는데 올해는 생장속도가 20일 정도씩 빨라져 다 조생이 돼버려 우리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더위 탓이다.
이곳에선 농법 연구도 진행 중이다. 파종 시기를 바꿔보고, 섞어 심는 작물도 조절한다. 고추밭 사이에 들깨와 파를 심었더니 담배나방 피해가 줄었고, 고구마밭 앞에 들깨와 결명자를 심었더니 멧돼지가 피해갔다고 한다. 기후위기로 수량(水量)이 변화할 것에 대비해 벼를 밭에 심어보는 실험도 해보고 있다.
기후위기 극복의 단초, 다양성
언론·출판 쪽 직장을 다니던 변 대표는 2004년 귀농을 단행했다. 뚜렷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국회 잔디밭을 걷는데 쑥이 보일 정도로 농사 자질이 있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경기도 시흥에서 땅을 빌려 여성 10명과 ‘연두농장’이라는 농사 공동체를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이때 토종 씨앗의 중요성도 처음 알게 됐다. 누군가 권해준 옥수수를 길러 맛있게 먹었는데, 이듬해 이 알곡을 심었더니 모두 시들어 수확이 거의 안 됐다. 알고 보니 종자를 보급한 다국적 회사에서 2대부터는 수확이 안 되도록 조작한 F1 씨앗이었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데, 요즘 농가에선 씨앗 챙길 방법이 없다. 해마다 종자는 사서 심는다. 이래선 안 될 것 같아 우리 씨앗을 찾아 나섰다. 2008년엔 토종 씨앗에 관심을 갖던 전국 농민단체들이 모여 협의체도 만들었다. ‘토종씨드림’의 모태다. 드림은 꿈이라는 뜻과 나눠준다는 의미를 함께 지녔다. 얼마 뒤 사정이 생겨 연두 농장이 폐쇄되고, 2011년 이곳 곡성에 자리잡았다. 토종씨드림의 사무국과 변 대표의 집이자 개인 사무실인 은은가도 이 무렵 직접 지었다.
15년의 노력 끝에 보유하고 육종 중인 토종 종자 종류는 수십 배로 늘었다. 한때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내용과 노력의 부재로 이내 사라졌다. 하지만 이곳에선 착실히 내실이 쌓이고 있었다. 특히 기후위기 때문에 중요성이 더 부각됐다. 현재 농사법은 다국적 기업이 개량한 종자를 기반으로 단일 작물을 대량 재배하는 쪽으로 발전돼왔다. 전반적으로 많은 생산량과 균일한 품질이 보장되는데, 종종 기후 조건에 따라 작황이 급격히 나빠지는 때가 생긴다. 올해 더위로 배추·감자·상추 등 여러 작물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에 비해 토종 작물은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땅도 환경과 기후·경작법에 따라 변해간다. 거기서 나고 열매 맺어 대를 이은 작물은 같은 종이어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 품종을 다른 지역에 심으면 결과가 또 다르다. 농사 조건이 안 좋아도 어느 품종은 수확량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변 대표는 “한 품종만 심고 질소를 많이 쓰는 농법을 고집하다가 덥고 습한 날씨가 오면 한순간에 농사를 망칠 가능성이 있다”며 “다양한 토양과 환경을 고려한 옵션을 보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수집·채종·보급 싸이클의 DB화
거대 종자회사가 장악한 국내에서 토종 씨 운동의 시작은 농부가 조용히 보관해오는 우리 씨앗을 발굴하는 것이다. 변 대표는 수집단을 구성해 2018년부터 전국 45개 군을 샅샅이 훑어 토종 씨앗 8000여 점을 찾아냈다. 하다 보니 안목도 늘어 이젠 지도만 봐도 토종 씨앗을 보전하는 농가가 있을지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일단 비닐하우스가 많이 보이면 아예 포기하고, 할머니들이 많이 보이는 곳에 주력한다. 정갈하게 정돈된 마을엔 십중팔구 있다”고 설명했다.
수집된 작물은 일단 분류해 이름을 붙인다. 농진청 분류법과 달리 품종 명과 수집장소, 그곳에서 부르는 이름까지 3단계로 구성된다. 장성 바닥 고추, 영광 구족 대파, 보성 박콩 같은 방식이다. 변 대표는 “경기도에선 홀아비 밤콩이라는 종자를 발굴했는데 이름을 들으니 얼추 유래와 생김새가 짐작이 갔다”며 “작물명 자체가 우리 언어의 보고인 셈”이라고 말했다.
분류한 씨앗은 1~2년 씨받기를 위한 재배를 거친다. 여기서 합격하면 비로소 최종적으로 데이터베이스(DB)에 올리고, 농가 지역 특성에 맞게 보급된다. 채종포 중간쯤 창고가 마련돼 있는데 여기서 국내 최대 규모인 약 4000여 점의 씨앗이 6도의 온도에서 농가에 배포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농가에 배포되는 씨앗은 모두 무료다. 대신 이들이 3~5년 기르며 데이터를 만들고 사무국과 정보를 교류한다. 일종의 데이터베이스가 쌓여 가는 셈이다.
보전과 보존…대농장과 토종의 공존
이곳서 선별된 씨앗은 농식품부 산하 유전자원센터와 경북 봉화의 씨앗저장고(씨드 볼트)에도 보낸다. 종 보존을 위해서다. 하지만 그런 기관은 말 그대로 보전이 아닌 보관 개념이다. 날씨와 토양이 변하는 만큼 심고 수확하며 변화에 적응하는 보전의 역할은 토종씨드림이 최고 규모다.
그 힘이 되는 것이 자원하는 농부들이다. 50명 안쪽으로 시작된 조직이 현재 회비 내는 정회원만 900명, 카페 들어오는 사람을 고려하면 1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특히 도시·주말 농부와 귀농자들의 관심이 많다. 이들을 위해 홈페이지(http://www.seedream.org/)에 작물과 농법을 공유하고, 전국 5곳에 씨드림 학교도 운영 중이다. 올해부터는 온라인 과정도 개설했다. 변 대표는 “젊은이 중에서 토종 씨앗에 관심이 많지만 경작지를 마련하지 못해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들을 위한 과정도 마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상업농이 대세인 현대 농촌에서 모든 농사를 토종으로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생산성과 입맛에 맞춰 다국적 기업이 개발한 씨앗에 의존해오던 농법이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한계를 드러내면서 대안이 필요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변 대표는 “다양성이 진화의 방향이고, 그를 위해 토종 대체가 아닌 토종과 기업적 대농의 공존을 모색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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