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그림 그리는 사람, 그림 그리지 않는 사람
밤새 자면서 모기한테 뜯겼다. 가려워서 막 긁어댄 것 같았는데 아침에 보니 아무런 흔적도 없고 가렵지도 않았다. 모기는 있었던 걸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가을 모기라 힘이 없어 그런가 보다. 문득 작은 깨달음이 온다. 힘들다고 아우성치던 시간도 지나면 다 꿈인 거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꿈이고, 이 한 생도 조금 긴 꿈이라는 걸 자꾸만 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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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이의 그림 보며 행복해져
사람들 예술작품에서 위안받아
예술가는 작품 만들 때 큰 행복
」
우리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낡아가는 알람 시계다. 언젠가 반드시 알람은 울릴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물건을 정리하는 버릇이 있다. 꼭 필요한 것, 꼭 남겨둘 것을 제외하고 고마운 사람에게 선물하곤 한다. 사람들은 귀한 걸 공짜로 줘도 고마운 줄 모른다. 돈 주고 사야만 귀한 줄 안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거저 받은 건데도 불평투성이다. 이제는 나도 공짜로 받은 선물인 나머지 삶을 고맙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전에 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그림 중 값나가는 건 일찌감치 다 선물 줘 버리셔서 내게 남은 값나가는 그림은 별로 없다.
며칠 전, 우리 대학 시절 최고로 유명한 작가 중 한 분이셨던 류경채 선생의 1981년도 작품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1981년이라니, 내가 첫 개인전을 열었던 해이다. 선생이 우연히 전시장에 들르셨다. 한참 둘러보신 뒤 “자네 큰 작가가 되겠네” 하셨다. 그 말이 오래도록 내게 힘을 주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힘을 실어주는 말을 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침묵하는 게 옳다. 그때 생각을 하며 나는 선생의 그림을 벽에 걸었다. 나는 내 그림이 아닌 남의 그림을 걸어본 적이 없다. 우리 집에 남의 그림이 걸려있다면 그건 몇십 년 전부터 계속 걸려있던 그림이다. 문득 남의 그림을 바라보니 쉬는 기분이다. 기분 좋은 평화가 마음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잠시 화가가 되지 말걸 싶다. 원화가 아니더라도 판화나 달력에서 뜯어낸 인쇄물이라도 남의 그림을 바라보며 행복해지는 평범함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사 두면 몇십 배로 가격이 오르기를 기대하며 그림을 사는 수집가 체질은 못되어서, 남들 다 하는 주식도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작가 사후에, 또 훨씬 그 뒤에 누구 그림값이 비싸질지는 늘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본 다큐 필름에서 세계적인 화상들에게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어느 그림은 비싸지고 어느 그림은 잊히는지 그 이유를 물으니 그들조차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저 작가와 그 작품의 운명이 다 따로 있다는 거다. 나는 비싼 그림이 무조건 좋은 그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싫다. 벽에 건 그림을 보면 행복해진다. 그러면 됐다.
어린 시절 나는 지금의 내 나이쯤이셨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실까 봐 늘 불안했다. 할머니는 몇십 년 뒤 98세에 돌아가셨다. 지금은 어머니가 내 불안의 주인공이다. 그 뒤는 내 차례일 것이 자명한 일이다. 나도 모르게 불안의 실체를 잠재우기 위해 예술의 길을 걸은 것도 같다. 백 살을 사신 원로 지식인분들께 나는 뭔가 배우려고 유튜브를 듣는다. 그 고독한 행보를 듣는 기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거꾸로 “얼마나 힘드셨어요?” 하고 등을 두드려 드리고 싶다. “성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하고 묻고 싶다. 왠지 안 아프고 마음 편한 거라고 말씀하실 것 같다. 언젠가 나도 오래 살아서 나보다 젊은 누군가가 내 삶의 좌우명이 무언지 물으면 이렇게 답하리라. “나도 남이라고 생각하세요. 힘들 때는 남의 일을 돕듯 이왕이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을 돕는겁니다.” 그러고보니 어디선가 들은 말인 것도 같다.
세상의 훌륭한 예술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선물을 주는 사람들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루어 죽은 뒤에도 그의 작품이 잊히지 않고 계속 갈채를 받는 사람을 성공한 예술가라고 정의한다면, 어쩌면 그들은 죽은 뒤에도 쉬지 못하는 피로한 존재들일지 모른다. 덕 보는 건 그들이 아니라 그 작품에 위안을 받는 보통 사람들이다. 물론 작품을 만들 때의 행복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래선지 요즘은 네 명 중 한 명은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며칠 전엔 늦게 그림을 시작한 지인의 전람회에 다녀왔다. 그림 속에 삶의 소소한 행복감과 열정이 담뿍 들어있어 좋았다. 이런 영화평이 생각난다. “이 영화를 이제 처음 보는 사람이 부럽다.” 지인의 첫 개인전을 보며 그런 기분이 든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 어린 시절의 꿈인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사람들, 모든 시작은 아름답고, 모든 과정은 인내의 연속이며, 모든 끝은 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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