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북한 ‘통일 지우기 개헌’ 보류의 속사정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월 헌법에 민족과 통일 개념을 지우고 영토 규정을 신설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최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의 지시를 이행하는 헌법 개정에 대한 발표가 없었다. 개헌 공개 유보설도 나오지만, 북한을 오래 관찰해온 필자는 발표를 안 한 것이 아니라 개헌을 못 한 것으로 본다. 한 달 전쯤에 어느 정도 감지됐다. 김정은 집권 이후 대체로 가을에 열리는 최고인민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이례적으로 북한 정권 창건일인 9월 9일 국정연설로 대체했다.
■
「 김정은 지시했지만 개헌 안 된 듯
관련 과제 얽혀 합의 지연 추정
혼란 우려해 모호성 유지 가능성
」
개헌이 지연된 배경에는 통일 조항 삭제 및 영토 조항 신설과 연관된 과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합의가 쉽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김정은은 연초에 “우리민족끼리와 평화통일을 상징하는 과거 잔여물 처리 대책 수립”도 지시했다. 노동당 규약과는 달리 북한 헌법은 정책의 결과를 반영하는 사후적 규범이다. 따라서 연관된 실무사업이 부진해 개헌이 지연됐을 가능성이 있다.
평화통일 지우기와 핵 개발 노선은 김정은의 대표적 정책이다. 그렇다면 수령이 내린 방침이 왜 이렇게 지지부진할까. 지난 10개월 동안의 추진 상황을 살펴보자. 북한 내부에선 그동안 민족과 통일 지우기, 대남 적대감 고취 작업이 진행됐다. 한국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핵 공격 위협과 함께 요새화를 위한 방어축성물 공사를 진행해왔다.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핵보유국 공인을 받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모두 여의치 않은 일이다.
통일 지우기 노선을 발표한 이후 예상치 않은 남한 흔들기 효과를 보면서 헌법 정비의 속도를 조절하는 측면도 엿보인다. 당초 북한의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론’은 대남 핵 사용 합리화를 위한 논리로 제기했다. 남북 체제 경쟁에서 밀린 열패감에서 시작한 핵 개발에 성공해 막상 남한을 위협하자니 동족이란 사실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김정은은 지난 2월 8일 건군절 연설에서 “동족이라는 수사로 괴뢰들과 대화·협력해야 했던 비현실적 질곡”에서 벗어나 “이제 언제든지 괴멸시킬 수 있는 합법성으로 초강경 대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런데 북한의 의도와 한국의 일부 해석이 달랐다. 한국 일각에서는 김정은의 적대 노선을 ‘남한과 단절해 독자 생존하려는 두 국가론(two Koreas)’에 방점을 뒀다. 심지어 ‘평화적 두 국가론’마저 등장했다. 김정은이 ‘독자적 국가 생존’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민족 부정과 적대’를 강조했는데도 남쪽에서는 이를 간과했다. 북한은 남한 여론이 이렇게 분열되자 당분간 모호성 유지를 선택했을 수 있다.
최근 김정은의 말 바꾸기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2일 군부대 시찰에서 “핵보유국과 충돌하면 대한민국은 영존(永存) 불가능”이라고 협박했다. 지난 7일 국방종합대학에서“남녘 해방이나 무력 통일에 관심 없다”고 말했다.
통일 지우기 개헌이 잠정 유보됐을 수도 있다. 심각한 내부 혼란과 지도력 의심 때문일 수 있다. 김정은은 수성이 아닌 창업 군주를 원하는 듯하다. 하지만, 스스로 발목을 잡는 ‘자승자박(自繩自縛) 효과’로 인해 세습 독재의 퇴락을 자초하고 있는 것 같다.
첫째, 선대의 통일 유훈을 부정해 세습 지배의 근거를 갉아먹고 있다. 지도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해설 보도가 없어 권력층의 지지를 받는지 의문이다. 북한 주민은 김일성 교시가 적힌 통일 문구를 지우는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워한다고 한다. 논리 개발이 어려운지 흔한 ‘주민 학습 제강’도 안 보인다.
둘째, 홀로서기 우상화에 이어 독단적 정책이 늘고 있다. 통일 지우기, 선대 지우기, 지방 챙기기 등 ‘김정은 브랜드’ 시책을 남발하고 있다. 문제는 실효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리더십에 타격을 준다는 점이다. 김일성 주석의 ‘태양’을 김 위원장 것으로 만들고, ‘친근한 어버이’ 노래를 전파하면서 간부들에겐 ‘김정은 단독 휘장’을 돌렸다.
셋째, 민족과 통일 지우기는 엄청난 행정적 부담을 초래한다. 2013년 고모부 장성택 처형 이후 그 여독 지우기에도 1년 이상이 걸렸다. 방대한 수령 문헌 등에서 민족과 통일을 지우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작업 과정에서 지도자의 비정상성을 일깨우는 역효과를 부를 수도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기범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연구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그 러닝화, 부상만 부른다…90%가 잘못 뛰는 '러닝의 진실' | 중앙일보
- 관객들 구토 쏟아냈다…'트라우마 경고'까지 뜬 충격 오페라 | 중앙일보
- 백현동 옹벽 추악한 진실…“덮어주면 은혜 갚겠다” 다가온 남성 | 중앙일보
- 타일러 "머저리, 진짜 짜증 나"…한강 '채식주의자' 남편에 분노 | 중앙일보
- 유명 트로트 가수 "혀 거의 없다"…설암 3기까지 간 충격 원인 | 중앙일보
- "왜죠?" 안경 벗으면 첫 신호다…쿠팡 김범석 '분노 3단계' | 중앙일보
- 초봉 5000만원·11시 출근…구직자 2000명 몰린 '꿈의 직장' | 중앙일보
- 축 늘어진 개 질질 끌고간 노인 "개소주 하려고…눈감아달라" | 중앙일보
- 친한 "윤 부부를 삼촌·이모라 부른다"…논란의 한남동 라인 누구? | 중앙일보
- 수상한 빌라, 24명 중 13명 임신 중…불법 대리모 조직 잡혀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