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존 배, 계획대로 사는 삶보다 성장하는 삶을 추구한 예술가
그는 “바흐의 음악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음악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각 피아노와 플루트를 연주했고, 형과 누나, 그리고 그 자신까지 모두 악기를 연주할 정도로 온 가족이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음악가 이야기냐고요? 아닙니다. 87세의 재미 조각가 존 배(John Pai) 이야기입니다. 그는 철사 조각을 용접해 이어 붙이는 작업을 평생 해왔는데요, 그가 11년 만에 한국에서 연 개인전 ‘운명의 조우’(갤러리현대, 무료)가 오는 20일 폐막을 앞두고 있습니다.
구리 코팅된 가늘고 짧은 철사를 정교하게 용접해 직조한 그의 작품은 반투명의 덩어리 같습니다. 작은 철 조각이 실처럼 한 땀 한 땀 공간을 가로지르며 엮은 형상입니다. 철은 단단하고 무거운 재료이지만, 그의 작품은 가볍고, 리듬감이 느껴질 정도로 유연해 보입니다. 그의 조각은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또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워 더 신비스러워 보입니다.
그는 “철사로 바흐가 대위법(對位法)으로 만든 음악과 같은 선율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음악에서 대위법은 두 개 이상의 독립된 선율이 동시에 연주되는 기법을 말하는데요, 바흐는 이를 통해 음악의 구조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질서 속에 부여한 작은 변주로 마법처럼 풍부한 화성을 내는 대위법이 이렇게 그의 조각에 녹아들었습니다.
지난 8월 말 한국을 찾은 그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내 작품은 하나의 음표에서 시작한다”며 “구상은 안 한다. 제로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사전 드로잉이나 스케치 없이 작업을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음과 음이 만나듯 나의 조각도 서로 얘기를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며 “그렇게 점과 선을 이어 나가면 작품이 된다”고 했습니다. 전시 제목 ‘운명의 조우’처럼요.
그의 할아버지는 구한말 순국한 의병장이었고 아버지 배민수 목사는 독립운동가이자 농민운동가였습니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존 배는 194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갔고, 뉴욕의 유명 미술학교 프랫 인스티튜트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이어 28세 때인 1965년 프랫의 최연소 교수로 임용돼 2000년까지 재임했습니다.
그런 그가 지난달 관람객과 만난 자리에선 이런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성공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작품은 제가 겪으며 앞으로 나아간 과정의 결과일 뿐”이라고요. 그러면서 그는 젊은 관객들에게 “계획대로만 살려고 애쓸 필요 없다. 계획은 그 과정에서 진화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안과 밖이 연결된 작품처럼 예술과 삶에 대한 그의 생각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그가 공간에 직조한 아름다운 선율에 귀기울여볼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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